이인좌의난(1728년)과 우리가문 (8) --- 1728년 양치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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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27 17:46 조회1,485회 댓글0건본문
⇒청안(현 증평)의 안렴사공 후손 김구석(金龜錫, 1684-1774)은 1728년(進士 4년)에 양치도(楊致道)가 난을 일으키자 창의하여 토적하였다고 하는데, 양치도의 난이 이인좌의 난과 동일한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적어 둡니다.
<디지털한국학>
이인좌(李麟佐)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여 목천·★청안(淸安)·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에 이르렀다.
■ 증평군청 홈페이지
김구석(金 龜 錫)1684-1774
자는 성응(聖應), 호는 락낙와(樂樂窩), 본관은 안동(安東),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塊山郡曾坪邑南下里)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글읽기를 열심히 하며 1725년(영조(英祖 원년) 과거인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728년(進士 4년)에 양치도(楊致道)가 난을 일으키자 창의하여 토적하였는데 오히려 적신의 무고를 입어 어전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한때 양치도와 같이 글을 읽고 가까이 지낸 적은 있으나 그의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바르지 못하여 지금까지 서로 보낸 편지를 되돌려주며 친구지간의 의를 끊었다는 그의 말과 행동이 이치에 정연하므로 국왕께서는 구석(龜錫)은 잘못이 전혀 없음을 내리시며 오히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인물이라 하며 은혜로 돌보아 주셨다.
영조께서는 「구석(龜錫)은 진실로 지방의 높은 선비」라고 이조판서에게 극히 칭찬하시여 관리로 등용하도록 하시므로 이조판서는 등용하려고 했으나 그는 노모께서 병중에 계시므로 봉양하기 위해 관리가 될 수 없다고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낸 충신이며 효자이다.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이란 증직 벼슬을 내리셨다.
■ 충청북도의 고서7 괴산군 (2002.12, 충북향토문화연구소)
p27
안동김씨재실(괴산 증평읍 남하리) : 고서 4권, 고문서 6권
p158
<안동김씨 죽헌공파 재실 소장 고서>
⊙진사공행장
진사 ★金龜錫의 행장이다. 김귀석의 자는 聖應이다. 시조는 고려의 金方慶이다. 이 행장은 숭정기원후4병오11월일통훈대부행사간원정언고령朴浚愚가 찬한 것이다. 또한 宋來熙가 찬한 진사김공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 솔내 - 양치도의 난?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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