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난(1728년)과 우리가문 (9) --- 오명항, 조현명,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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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28 17:28 조회1,477회 댓글0건본문
●오명항(吳命恒)
1673(현종 14)∼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영의정 윤겸(允謙)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수량(遂良)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를 거쳐 설서·사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 1713년에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歸鹿集. 〈鄭德基〉
*오명항 양무공신교서
*오명항 영정
*오명항 토적송공비
*오명항 필적
★조현명 : 안렴사공파 화산군 후손 김성유의 사위, 장인 김성유 행장 찬, 김희 묘갈 찬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잉03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黨議通略, 韓國黨爭史(成樂熏, 韓國文化史大系 Ⅱ,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5)
歸鹿趙顯命硏究(鄭萬祚, 韓國學論叢 8, 國民大學校, 1985). 〈鄭萬祚〉
★박문수 : 백곡 김득신 교유한 구당 박장원의 증손, 송천서원(주벽 김사렴)에 배향
●박문수(朴文秀) - 1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이고, 세마(洗馬) 선(銑)의 손자로,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고,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하여졌다. 같은 해 도당록(都堂錄-홍문관의 교리와 수찬을 뽑을 때의 기록)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자체 내의 인신(印信)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줄 뿐 아니라, 중간에 간리(奸吏)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은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음을 들어 병조판서의 인신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줄 것을 주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당하였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으며,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국가에서 대내(大內)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 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 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조대의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공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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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
▣ 김은회 -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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