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29--- 화산군의 발자취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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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1 01:44 조회1,453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후손 화산군 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우암집 국역사업이 2004년 5월말 현재 6권중 4권이 국역 완료되었습니다. 7월 중순이면 1차 번역작업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화산군 문집 우암집을 국역하면서 여러가지 현양사업을 병행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신도비를 개수하였고, 영정 제작도 고려중에 있습니다. 특히 후손간의 모임과 교류와 화합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화산군의 발자취를 구체적인 흔적은 거의 없지만 기록을 찾아 보는 것도 매우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기록을 더듬어 가며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 합니다. 한번 기회를 만들어 가까운 서울만이라도 실제 답사가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 이겠습니다.
서울의 옛 지명에 대한 자료가 있으신 분은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세(중종7, 1512, 임신, 정덕7)
---9월 7일, 서울 집에서 태어나다.
▶ 서울 집 : 미상. 부 안원군(공량) 서울 본댁 혹은 외가(외조부 이팽수 家) 추정
○ 6세, 정축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숙부이신 목사공(휘공망)이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 8세, 기묘
---부친 판서공(휘공량)은 주계군 성광 이심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殿試를 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 버리고 문을 닫아 걸고 궤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 두지를 않았다. 공(김주)의 학문과 행실은 대개 이러한 가정의 전통에서 얻은 것이다.
○ 10세 신사
---8월, 할머니 정부인 임씨의 상을 당하였다. 이때 숙부 병사공(휘공석)이 외직으로 나가 보성군의 군수가 되었는데, 병사공이 정부인을 모시고 그리고 갔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르러 관아의 집에서 임종을 하신 것이다. 9월에 널을 받들어 여주 蛇洞의 선영에 임시로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다음해 3월에 할아버지 참판공(휘성)의 묘 곁에 부장을 하였다.
○ 17세 무자
---7월에 숙부 목사공(휘공망)의 상을 당하였다.
○ 19세 경인
---봄에 부인 이씨를 맞았다. 부인의 본관은 전주로, 진양군수 이영의 따님이자, 파평부원군 헌의공 윤금손의 외손이시다. 병자년 7월 5일에 태어났으니 방년 15세였다.
○ 20세(중종26, 1531, 신묘, 가정10)
---9월에 식년 진사시의 會試에서 3등으로 합격하였다. 예조에서 一所의 上으로, 장악원은 二所의 上으로 뽑았는데, 종조숙부 승지공(휘공예)이 보덕으로서 二所의 참사관이었으므로 一所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예조(禮曹) : 종로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 예악, 제사, 연회, 학사, 과거 등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구한국 시절에는 學部가 자리를 잡았다.
----- 지금 정부 제1종합청사 (광화문 앞) 거리는 육조앞, 육조거리, 해태앞 등으로 불려졌는데, 이 일대에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판서의 관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악원(掌樂院) : 서울시 중구 을지로2가 181 (외환은행본점 좌측 화단)
○ 21세 1532년 임진
---반궁(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하였다. 器宇(도량)가 아주 크고 喜怒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문장과 언의가 사림에서 단연 뛰어났다. 서경덕, 성운, 김인후, 민기 등 여러분과 특히 우정이 깊었다. 연방계회축이 있다.
▶반궁(성균관) :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 22세 1533년 계사
---가을에 여주로 가서 선영에 성분하였다. 이어서 모재 김안국을 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乖崖(괴애)와 人占畢(점필)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주 선영 :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
▶이호촌 : 경기 이천시 ???
○ 23세, 갑오
---9월에 종조숙부 현령공(휘지)의 상을 만났다.
○ 26세 정유
---5월 28일에 따님 윤씨부(훗날 윤엄의 아내)가 태어났다.
---12월에 관유(館儒, 성균관 유생) 윤희성과 이충남이 상소하여 기묘 사림의 원한을 풀고자 하여 공을 청하여 재중에서 함께 고하자고 하였다. -----그때 문학과 행의 때문에 공이 윤희성, 조희윤과 나란히 이름이 높아서 사람들이 그 세분을 洛河三玉 이라 일컬었다.
○ 27세 무술
---숙모 정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 28세(중종34, 1539, 기해, 가정18)
---6월 6일에 동재 유생 유례선 등과 상소하여 요승 보담 행사 두 사람을 죽이고 봉선사 봉은사의 두 절을 훼철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상이 태학(성균관)에 행차하여, 유생을 모아 경전을 비껴두고 문난하였다. 공이 주역을 진강하였는데, 변론하고 대답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였다. 이에 상이 그 해 겨울의 별시에 직부하는 것을 허가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4일, 광화문의 별시문과에 제일인으로 장원하였다. 논제는 "장량이 항우를 추격하도록 권하다 (張良勸追項羽論) 였다.
---12월에 승문원 정자에 선보되었다.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에 천수되었다.
▶성균관
▶광화문 : 경복궁 정문
▶승문원
▶예문관
○ 29세(중종35, 1540, 경자, 가정19)
정월 10일에 예문관 대교에 배수되고, 다른 직은 이전처럼 겸직하였다.
---정월 18일,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을 배수하였다.
---4월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을 배수하였다.
---6월 21일,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을 배수하였다.
---6월 25일 지평 이현당을 체직하고-----
---7월 5일, 지평 윤현의 거취가 상도를 벗어나서 대관으로서의 체통을 대단히 잃었으므로 체직할 것과-----
---7월 12일 내금위 장 유개에게 남자한 것을 환수하고-----
---7월 25일 다음과 같이 계청하였다.-----
---7월 23일 근일에 연경에 가는 사신들이 무역을 금하는 법률을 어기고 있으니, -----
---8월 2일, 황해도 도사 임수는 어리석고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마정을 맡길 수 없으므로 체직하라고 계청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배수되었다. ?사간원 정언에
▶예문관
▶홍문관 :
▶승정원
▶사헌부 : 종로구 세종로의 종합청사 남쪽 교통방송국 앞. 관리들의 잘못을 따지고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은 관청. 종2품 대사헌이 수장이며 사간원을 포함하여 臺諫이라고도 하였다. 사헌부의 위치는 고지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사간원 : 종로구 사간동 65번지. 왕에 대하여 충고하고 왕의 과실이나 여러 정책에 대하여 그 가부를 따져 논박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므로 사간원 관리들은 임금과 신하의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뿐 아니라 스스로 모범이 되어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본으로 삼았다.
-----다음에 계속
▣ 김용주 - 이호촌.이포강 나루근처 지금의 상백리 근처가 아닌가 싶씁니다. 대부 감사합니다.
▣ 김윤식 - 후손들 간에 더욱 화목해지는 계기가 되니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국역사업이 잘 마무리되길 빕니다.
▣ 김항용 - 부디 화산군 선조님의 국역 우암유집 발간 작업이 잘 진행되길 기원하며, 제주의 익수아저씨께서도 열심히 <국역 우암유집 초본>을 교정하고 계심을 알려 드립니다.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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