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37---북경 사행길 4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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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7 16:35 조회1,908회 댓글0건본문
황제의 도시 북경
1. 도교사원 동악묘 (산해관-동악묘, 동악묘 패루-옛 조양문 터-자금성)
▲사행이 북경 도성의 동대문이라 하는 조양문 밖에 이르면 중국 조정에서 접반관이 통관을 대동하고 도교사원 동악묘에 나와 마중을 한다. <열하일기>에서 심양의 고궁보다 볼거리가 많은 북경 굴지의 장관이라던 동약묘의 세 개의 패루 중 지금은 이 남쪽 패루만이 남아 있다.
▲동악묘 정문 양편에 있는 2층 종루의 모습 중 왼편 종루가 보인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볼썽 사나웠다.
2. 사행길 숙박소 옥하관 (천안문광장 오른쪽 캐피탈호텔이 옥하관, 옥하교 자리, 시정부, 최고법원 주변)
▲북경에 가면 우리 사행이 묵게 마련인 영빈관이랄 수 있는 옥하관 자리에는 러시아 공사관 터를 거쳐 지금은 캐피탈 호텔이 들어서 있다. 오른편 인조 정원 자리가 바로 옥하교가 있던 자리요, 그 왼편 위쪽에 옥하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3. 금지구역 관상대 (북경역, 국제호텔 인근 건국문 앞 북경 관상대)
북경의 관상대는 1296년 원나라 임금 홀필열이 북경성 동남 모서리에 구축한 그대로 지금껏 남아 있다.
▲元 明 淸 삼대에 걸쳐 천문 관측을 했던 관상대 옥상. 지금은 한족 출신인 관리인이 친절히 맞아 주었지만 박지원 홍대용 등이 찾았을 때는 天命을 받드는 신성한 곳이요,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유일한 곳이라 하여 오르지 못하게 했던 곳이다.
▲관상대 옥상에 오르지 못했던 연암은 관상대를 관장하는 흠천감영 해시계 있는 곳에서 이 관상대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백여 년전 연암이 바라 보았던 시각에서 올려다본 관상대 전경
4. 포교의 산실 동천주당 (천안문 우측 북경반점 지나 옥부정대가 동천주당)
▲소현세자가 북경에 체류했던 70일 간 처소로 사용했던 자금성의 문연각. 문연각은 宮城 도서관으로 수리를 핑계삼아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자금성의 지붕이 모두 황색인데 문연각의 지붕만 녹색인 것은 황금색이 불을 類感시킨다 하여 禁火하는 뜻에서라 한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내왕했던 동천주당. 지금 이 동천주당에서는 미사를 보고 있었으나, 구내에는 콘크리트 탁구대를 설치해 놓는 등 소학교의 부속 시설로도 활용하고 있다.
5. 서책 골동품 상가 유리창 (천안문 광장 왼편 아래 선무문 인근 유리창 東街, 西街)
▲박지원을 비롯, 홍대용 이덕무 김정희 등 사신길 갔던 명사치고 들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던 북경의 골동품 서책 문필의 집산 상가 유리창의 현재 모습. 중국에서 손꼽는 명필들의 글씨 아닌 것이 없는 간판의 옥호만 달라졌을 뿐 규모나 모양새는 옛날 그대로다. 이 유리창 가게 주인들은 단골을 정해 놓고 찾아 다니는 우리 학자들과 필담을 나누고 연작시를 짓는 등 우의를 돈독히 했다는 기록도 있다.
6. 숭정제 자살나무 (자금성 신무문 뒤 경산 만춘정 아래 숭정제 자살목)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 밖에 있는 표고 43미터의 경산 전경. 그 산정이 북경의 중심으로, 萬春亭이 세워져 있다. 아래 보이는 궁은 임금이 별세하면 이곳에 모셔 두었기에, 문상을 위해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은 조석으로 이곳에 와 상례를 치렀다. 지금은 유적지로 개방됐지만 옛날에는 황제와 왕후의 자가용 산책로였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을 침입한 이자성에게 쫓기어 목매어 죽은 槐木과 그 현장 설명 표찰. 자금성 뒷산인 경산 아랫녘에 있다. 본 나무는 고목이 되어 없어지고 그 고목의 새끼 나무를 키운 것이다.
경산은 원나라 때 궁중의 땔감인 석탄을 쌓아 놓았다 하여 매산(煤山)이라고도 하고, 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만수산(萬壽山) 또는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했다.
연암은 萬歲와 萬壽의 중국 발음이 같아 한 산에 두 이름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증해 보니 자금성의 북쪽 산인 경산이 만수산이요, 만세산은 인공 호수인 태액지 복판에 있는 인공성 경화도(瓊華島)의 인공산이라 했다.
이 만세산에 광한전(廣寒殿)이 있었는데, 연암은 이 광한전에 가 전각에 걸려 있는 전기(殿記)를 보고 이렇게 써 남기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태자가 고려 사신 이공수(李公遂)를 광한전에 불러 보았다 했으니, 바로 이 만세산에 있는 광한전이다. 또 고려 원종은 이 북경에 몸소 와서 만수산 玉殿에서 황제와 작별하였고, 또 고려 사신 신사전(申思佺)은 만수산 옥전을 두루 구경했다 했으나 다만 옥전이라 말하고 전각의 이름을 적어 남기지 않아 어딘지 알 수 없다."
7. 동육궁의 비애 (신무문 안, 후궁거리 동육궁)
▲중국 황제의 후궁들이 들어 살았던 동육궁의 후궁거리. 여섯 개의 궁이 用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거리는 조선에서 바쳐진 공녀 가운데 후궁이 된 숱한 여인들의 애환과 한이 서린 곳이다. 또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조선 여인 여씨가 질투했다 하여, 형틀에 묶여 불지짐을 당하며 죽어 갔던 바로 그 비정의 현장이기도 하다.
8. 굴욕의 습례성 (천안문 안 중산공원 습례정)
▲경산 옆의 북해공원. 역대 황제들의 정원으로, 거대한 호수가 있고 백탑으로도 유명하다.
▲천안문 동쪽에 위치했던 홍려사는 禮를 관장했던 관아로 청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철거됐는데, 事大儀禮를 강요했던 습례정만은 천안문 안인 중산공원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자금성의 정원인 이화원. 자연과 함께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공 정원이다.
9. 천안문 석사자 (천안문 앞)
▲자금성의 성문인 천안문 앞에 세워진 경천주. 궁문이나 관문 앞에 서 있게 마련인 이 돌기둥은 옛날 임금이나 수령의 다스림이 옳지 않을 때, 그 잘못을 글로 써 붙여 고발하는 비방목(誹謗木)이 그 뿌리라 한다. 그 기둥 위와 둘레에 새겨 놓은 석수(石獸)들도 사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지키는 짐승으로 이 모두 정치의 정도를 상징하는 석물들이다.
10. 남천주당의 성화 (천안문 광장 왼편 신화사통신 못미쳐 남천주당)
▲천주교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연암이 그리스도상을 처음 접하고 영감을 체험했던 북경의 남천주당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이 이곳의 구베어 주교에 의해 영도 되었다는 남천주당의 성모 마리아상
11. 황색 신앙의 기원
▲북경의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자교 놀이. 우리 돈 30원 꼴의 돈만 주면 3분 동안 천자교를 타고 흔들리는, 황제가 되는 놀이다. 삼현육각(三絃六角)에 선도되는 이 천자교는 가마부터 가마꾼이 입는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황색 일색이다.
▲북경에 있는 모든 궁실과 고옥(古屋)들의 지붕은 온통 노란색이다. 자금성 밖 북동쪽에 있는 라마교 사원 옹화궁의 지붕 역시 노랗다.
12. 끝을 맺으며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전경. 우리 사신들이 궁에 들리면 새벽 4시쯤 이문전에 와서 의식에 쓰는 코끼리를 구경하며 서성거렸다. 황제의 노여움을 산 사건이나 반체제 사건은 황제가 바로 이 오문 다락에 나와 손수 고문을 하고 장살(杖殺)했다. 또한 전쟁에서 잡혀 온 포로도 이 문전에서 황제에게 친람시켰다.
▲도도한 청 왕조의 위용을 자랑하던 자금성. 이제 한낱 고궁 박물원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유적지가 되고 있을 뿐이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 김용주 - 감사함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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