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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과 李承休 01 --- 이승휴(1224-1300)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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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23 21:16 조회1,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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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1224-1300)의 일생의 행적과 그의 문집 <동안거사집>을 보면, 이승휴는 충렬공(김방경, 1212-1300) 보다 12살 연하이지만, 특히 만년의 행적이나 청렴 강직한 성품이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1280년 충렬왕의 측근세력과 대립한 점, 이후 삼척 두타산 아래 은거하면서 1287년 제왕운기를 저술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우월성을 확립하고, 居士로서 불교에 탐닉하면서 충렬공과 친밀히 교유한 점,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펼칠때 특별히 기용된 점을 보면 충렬공과 이승휴는 거의 같은 행로를 밟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승휴의 문집 <동안거사집>은 저자의 ‘잡저(雜著) 일부’와 ‘행록(行錄) 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잡저 일부’는 저자의 저술이 많았으나 산일(散佚)되고, 만년의 저작 14편만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이 ‘잡저 일부’중에 1295년 이승휴의 단모부, 1296년 충렬공의 답신, 그리고 충렬공께서 만월봉 요요암 신화상에게 답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사후 60년이 지나서 1360년 이승휴의 아들 이연종이 선친의 만년의 저작 14편만을 수습하여 실은 중에도 3편이나 있으므로, 1295년 이전의 충렬공과 이승휴의 교유 시문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충렬공께서는 제2차 일본정벌 전부터 치사의 뜻을 피력하시고, 1281년 일본정벌을 다녀 오신후, 1283년 치사(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1300년 돌아가실 때까지 근 20년간에는 특별한 행적은 보이지 않으므로 불교에도 탐닉하시면서 비교적 한가하게 여러 인사들과 교유가 많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교유가 많았던 이승휴의 일생을 살펴 봄으로써 충렬공의 만년 행적을 간접적으로 느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요즘 국립중앙도서관과 역삼동 학위논문관에 들려서 ‘이승휴’, ‘제왕운기’, ‘동안거사집’을 연구한 논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계속 찾아가면서 정리하면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디지털한국학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사람으로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신서(申#서41)에게서 《좌전 左傳》과 《주역 周易》 등을 익혔으며,



125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 구동(頭陀山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263년(원종 4)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내고,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봉기하였을 때에는 군수(軍需)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極論)하였으며,



1273년에는 식목록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贓吏)7명을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가 원한을 사게 되어 곧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는데,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임명되었으나 1280년(충렬왕 6)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歸去來辭〉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고, 여기서 《제왕운기》와 《내전록 內典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試#비58書監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判#비58書寺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결국 같은해에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저작으로서 《제왕운기》가 있고,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 東安居士集》이 전하여지고 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속에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주적인 역사서라는 것에서부터, 유교사관을 내세워 원나라에 대한 사대를 합리화하는 사대적·비자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東明王篇과 帝王韻紀의 硏究―(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1962;韓國의 歷史認識 上, 創作과 批評社, 1976)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向(金哲埈, 考古美術 129·130合號, 1976)

李承休의 生涯와 歷史認識―帝王韻紀를 中心으로―(劉璟娥,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李益柱〉









조충---조계순---조변---딸+유자우---딸+이임종(이승휴 아들)

김방경---딸+조변

*김방경의 외손녀(조변 딸) 사위 유자우는 이승휴의 사돈



■ 디지털한국학

유자우(庾自$우04)

1260(원종 1)~1313(충선왕 5).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관인. 본관은 무송(茂松). 초명은 서(瑞).

삼한공신 금필(黔弼)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승선(左承宣)을 지낸 해(垓)이다. 조충(趙#충01)의 손자로서 충렬왕 때 지밀직사사를 지낸 조변(趙#변04)의 딸과 혼인하여 3남 5녀를 두었다.

사위 가운데는 이승휴(李承休)의 아들인 임종(林宗)과 찬성사 정인경(鄭仁卿)의 아들인 신수(信綏) 등이 있다.



1276년(충렬왕 2) 서재장판관(西材場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280년 권도평의녹사(權都評議錄事)가 되었다. 이후 9년 동안 7·8품에 머물다가 1288년 장인인 조변이 병으로 면관(免官)하게 되자,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신호위보승낭장(神虎衛保勝郎將)에 초수(超授)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감찰어사를 겸하였다.

1290년 인물추고구급염세별감사(人物推考救急鹽稅別監使)가 되어 충청도에 파견되었고, 다음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임명되었다.



1297년 감찰시사(監察侍史)를 거쳐 동계교주도안렴사(東界交州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때 삼척현에 은거하고 있던 이승휴를 방문하여 충선왕의 명에 따라 초치하였다.



1301년 권신의 미움을 받아 강화군부사(江華郡副使)로 좌천되었다가 곧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올랐으며, 계속해서 예빈령(禮賓令)·삼사총랑(三司摠郎)·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삼사우윤 지통례문사(三司右尹知通禮門事) 등을 역임한 뒤, 1307년 판통례문사 선운별감사(判通禮門事選運別監使)가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검교첨의평리 행상주목사 겸 상락성산도전민계점사(檢校僉議評理行尙州牧使兼上落星山道田民計點使)에 제수되고, 다음해 다시 복주목사(福州牧使)로 옮겼다.

1310년에 다시 해주목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병을 얻어 면관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韓國金石文追補,

高麗時代의 茂松庾氏家門 分析(朴龍雲,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朴玉杰〉







▣ 솔내 - 좋은 착상입니다. 여기서 또다른 대어가 나올 수도 있을런지... 기대됩니다.

▣ 김항용 -

▣ 김발용 - 충렬공 할아버지와 동안거사....7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 김윤만 - 기대가 큽니다.

▣ 김윤식 - 저도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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