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烈公과 李承休 04 ---1273년 6월, 이승휴의 연경 使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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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29 20:48 조회1,743회 댓글0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이승휴(李承休)
1273년에는 ---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하여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사행(使行)하였는데,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하도록 권유하였다.
□ 이승휴의 사행길 (1273.6.9~10.25)
동안거사집 권 제4의 <賓王錄(빈왕록)>은 원종14년(1273) 이승휴 나이 50세 때 원나라가 황후와 황태자를 책립하였다. 따라서 賀進使 順安公 悰을 수행하는 書狀官의 신분으로서 연경을 왕래하며 느낀 여정과 원나라의 館伴 侯友賢(후우현)과 酬唱한 詩들을 모은 것이다. 그해 6월 9일에 출발하여 10월 25일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편찬 시기와 취지가 병서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충렬공의 元나라행 (1273.가을 7월 을미일~1274.1)
<고려사, 고려사절요>
충렬공께서는 진도와 탐라도에서 삼별초를 완전토벌하고 나서 시중으로 계실때인 62세때 1273년 가을 7월 을미일에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0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흔도.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승휴의 대도성(연경) 使行길(1273.6.9-10.25) 기록을 통하여,
한달 늦게 출발한 충렬공의 사행길(1273.가을7월 을미일~1274.1)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승휴가 使行의 길을 떠난 지 3일째 되던 날 패강(대동강)에 도착하여 지은 시를 보면, 때는 여름인지라 장마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흙탕물로 인해 길을 분갈할 수 없고, 대동강 물이 불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휴가 元으로 출발한지 거의 석 달째인 8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외국사신 접대관인 侯友賢(후우현)이 詩를 지어주고, 이승휴도 詩로 답하고 있다.
마침 비가 많이 내려서 길이 지연되어 거의 석 달에 가까운 여정 끝에 간신히 元나라에 도착하니, 이 달(8월) 24일 원제는 開平府(상도, 제2의 수도)에 巡守를 마치고 돌아와 그 이튿날에 萬壽山 廣寒宮의 玉殿으로 가시어 하례를 받고 연회를 베풀고 있는 참이었다. 이승휴가 元帝에게 表文을 올리고 있다.
이때는 元이 萬壽山 동쪽에 새로이 宮殿을 세워서, 원제가 이달(8월) 27일 諸侯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모아 놓고 낙성식을 거행하고 있는 때였다.
□ 대도성(연경) 만수산 광한전 옥전
<新 열하열기 (1997, 이규태, 신원문화사)>
숭정제 자살나무 (자금성 신무문 뒤 경산 만춘정 아래 숭정제 자살목)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 밖에 있는 표고 43미터의 경산 전경. 그 산정이 북경의 중심으로, 萬春亭이 세워져 있다. 아래 보이는 궁은 임금이 별세하면 이곳에 모셔 두었기에, 문상을 위해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은 조석으로 이곳에 와 상례를 치렀다. 지금은 유적지로 개방됐지만 옛날에는 황제와 왕후의 자가용 산책로였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을 침입한 이자성에게 쫓기어 목매어 죽은 槐木과 그 현장 설명 표찰. 자금성 뒷산인 경산 아랫녘에 있다. 본 나무는 고목이 되어 없어지고 그 고목의 새끼 나무를 키운 것이다.
경산은 원나라 때 궁중의 땔감인 석탄을 쌓아 놓았다 하여 매산(煤山)이라고도 하고, 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만수산(萬壽山) 또는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했다.
연암은 萬歲와 萬壽의 중국 발음이 같아 한 산에 두 이름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증해 보니 자금성의 북쪽 산인 경산이 만수산이요, 만세산은 인공 호수인 태액지 복판에 있는 인공성 경화도(瓊華島)의 인공산이라 했다.
이 만세산에 광한전(廣寒殿)이 있었는데, 연암은 이 광한전에 가 전각에 걸려 있는 전기(殿記)를 보고 이렇게 써 남기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태자가 고려 사신 이공수(李公遂)를 광한전에 불러 보았다 했으니, 바로 이 만세산에 있는 광한전이다. 또 고려 원종은 이 북경에 몸소 와서 만수산 玉殿에서 황제와 작별하였고, 또 고려 사신 신사전(申思佺)은 만수산 옥전을 두루 구경했다 했으나 다만 옥전이라 말하고 전각의 이름을 적어 남기지 않아 어딘지 알 수 없다."
1)
다음은 동안거사집 <빈왕록>에 실려 있는 작품의 일부인데, 이승휴가 使行의 길을 떠난 지 3일째 되던 날 패강(대동강)에 도착하여 지은 것이다.
어두운 산곡에 물동이를 엎지른 듯 쏟아지는 비
갈림길에 도달하자 붉은 물줄기가 콸콸 흐르네
일엽편주를 작다고 얕보지 말라
만경의 거센 물결을 단번에 건너가려네
여름인지라 장마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흙탕물로 인해 길을 분갈할 수 없다고 하여 使行의 初行으로서 먼길을 떠나는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장마 비에도 지체함이 없이 불어난 강을 단숨에 건너가려는 그의 사명의식이 잘 드러나 보인다.
2)
다음은 이승휴가 元으로 출발한지 거의 석 달째인 8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외국사신 접대관인 侯友賢(후우현)이 지어준 詩이다.
사해의 교통과 문화가 하나로 통하기에
좋은 때를 타고 풍운처럼 서로 만날 수 있었네
만리 머나먼 길에 상국의 손님으로 오시어
광주리에 넘치는 옥백으로 중궁을 축하했네
아이들은 언어가 다르다고 괴이쩍다 하지만
군자들은 다 알도다. 도의가 서로 같음을
스스로 말하는 무재 견문이 얕아
서투른 시로 동방의 기록에 올리기 부끄럽다네
먼저 上國까지 머나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는 인사말과 함께 비록 교통과 문화가 달라서 서먹서먹하지만 道義가 서로 통한다고 하여 일체감을 돋우고 있다. 이러한 후우현의 깍듯하고 겸손한 예절은 使行들의 외교관계에서는 만고불변의 예절로서 몸에 체득하였던 것이다.
2-1)
곧 이승휴는 이러한 후우현의 시에 次韻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서로 만나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괴어쩍어 말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단 한 번에 알아보리
아홉 대문에 나를 인도해 천폐에서 추창케 하고
다섯 살에 그대는 뛰어나게 제궁에 숙배하였다지
인품의 격차는 멀어 하늘과 땅 사이지만
깊이 사귄 정은 도리어 형과 아우 사이 같다네
일월의 광명을 보좌하여 천하를 빛내었어라
은혜의 빛발은 발해의 동쪽에 더욱 치우쳐 비치었네
3)
다음은 使行들 一行이 거의 석 달에 가까운 여정 끝에 元에 도착한 후, 8월 24일에 이승휴가 元題에게 올린 최초의 表文의 草稿로서 역시 그의 <빈왕록>에 실려있는 것이다.
이 달(8월) 24일 황제 폐하께서 開平府에 巡守를 마치고 돌아와 그 이튿날에 萬壽山 廣寒宮의 玉殿으로 가시어 進賀를 받는데, 姜 任 두 宣使가 종전과 같이 인도하고 가서 표문을 올리니, 그 禮數는 일체 황후께 올릴 적과 같았다.
---생략---
元帝에게 올린 이승휴의 이와 같은 草稿는 元帝뿐만 아니라 郎吏들로 하여금 자못 歎服케 했다.
마침 비가 많이 내려서 길이 지연되어 간신히 元나라에 도착하니, 황제가 開平府를 순시하고 나서 廣寒宮에 들러서 하례를 받고 연회를 베풀고 있는 참이었다. 이튿날 侯邸(순안후를 가리킴)께서 表文을 올려 陳謝한 바 宣美使 甫羅達이 번역을 하여 아뢰니, 황제가 이르기를,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한문의 격식은 어떠한가.” 하매, 여러 令吏들이 아뢰기를, “문장의 격식은 맞습니다.” 하였다.
이때 本朝에서 들어가 宣慰使가 된 姜守衡이라는 자가 후저께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우리나라가 臣事한 이래 이처럼 성대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일행들이 모두 기뻐하며 치하를 하고 중국사람 중에서도 표문의 초고를 구하여 다가 보려는 자가 있었으며, 그뒤 후저께서 출입하면 세 번이나 황제를 뵙는데 그때마다 표문을 가지고 치하하곤 하였다.
또 館伴使 한림학사 侯友賢이 후저께 치하하기를, “무릇 올린 表章을 두고 三省의 郎吏가 다들 훙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宋 上國이 이따금씩 하는 말이,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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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승휴가 元帝에게 올린 表文의 초고는 이것 외에도 그의 <賓王錄>에 서너 篇이 실려 있는데, 한결같이 그의 條理있는 言辯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서 本稿에서는 1편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황제 폐하께서, 이달(8월) 27일 諸侯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모아 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깃발 일산 등의 일체 의장이 창공에 펄럭여 해를 뒤덮어서 사람의 눈을 현혹케 하였다. 여러 대왕 및 대왕의 관원에서부터 百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새벽에 모여들어, 朝服을 입고 장화를 싣고 笏을 잡지 않은 사람이 없이 차려 입고 구름처럼 모여서니, 閤門使라는 사람이 각기 서열대로 인도하여 拜位로 나아가는데, 배위는 지면에다 물감을 칠하고 흰 龍0席을 깔아서 方0를 이루어 배위를 구별 짓고 거기다가 官號를 써 놓았다. .....그 禮數는 우리 본조의 예수와 대동소이한데, 이른바 다른 점은 각문사가 ‘鞠躬, 拜興’ 하고 외치면 班首가 조금 앞으로 세발짝 나가서 復位를 한 다음 절하고 일어나고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펴고, 홀을 꽂고 국궁을 하고, 舞蹈를 세 번 한다음, 왼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萬歲, 萬歲, 萬萬歲를 외치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빈왕록>에 실려 있는 것으로써 上國인 元이 萬壽山 동쪽에 새로이 宮殿을 세워서 落成式을 거행하고 있다. 당시 禮式의 節次가 우리나라와 비교되어서 敍事的으로 잘 묘사되어 있고, 班列한 文武百官들의 服裝과 자리배치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 예식의 규범을 보여 주고 있는 史料로서의 가치가 실린 중요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방면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훌륭한 參考資料가 되리라 생각된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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