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忠烈公과 李承休 08 ---최탄 한신의 난과 동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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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03 17:38 조회1,558회 댓글0건본문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10년(원종)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차 떠나려고 하였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지금 몽가독이 만약 서경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면 임연은 이미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자라 필연코 주둔 군대의 양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당여(黨與)가 아닌 자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러한 인물을 선택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즉 서북면)를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세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곧 김방경에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군(원나라 군대)이 서경에 도착하여 만일 대동강을 넘는다면 왕경(개성)에서는 스스로 소란해져서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대동강을 넘어 서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황제에게 이 뜻을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리어 원군으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줄 것이라고 명령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최탄 등이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한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은밀히 꾀하면서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를 꾀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그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키었다.
이보다 앞서 ★임연은 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몽고 군대를 청해 올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막으려고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로 하여금 야별초를 인솔하여 ▲황주에 주둔시키고 또 신의군(神義軍)은 ▲초도(椒島)에 주둔시켜 방어하게 하였다.
★최탄 등이 그 계책을 알고 가만히 배들을 준비하고 정예한 군사들을 모으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임연 등이 장차 관인(官人)과 원나라의 군대들을 죽이고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청컨대 관인께서는 사냥하러 간다고 널리 선전하고 경군(임연 지휘하의 군대)의 왕래 정형을 정찰하여 서로 통보하도록 하면 우리들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에로 진공해 가겠으니 그때 관인이 ▲착량(窄梁-인천 부근의 좁은 해협지대)으로 군대를 영솔하여 나가 있으면 그들이 진격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황제께 구체적으로 아뢰게 된다면 왕경(개경)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곳의 젊은 남녀들과 재물들은 다 당신의 것으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몽가독이 좋아하면서 그렇게 할 것을 승낙하였다.
이때 영원(寧遠) 별장(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 ★오득공(吳得公)이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이 일을 알고 가만히 김방경에게 일러 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니 오득공이 “만약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은밀히 정탐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숙소인 객관의 문 앞에 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와 있었고 최탄과 한신 등은 좋은 기분을 띠고 있었다.
몽가독이 김방경더러 이르기를 “오랫동안 손님 노릇을 하고 있노라니 대단히 심심하다. 생선잡이라도 해서 즐겨 볼까 한즉 공(김방경)은 나를 따로 오시겠소?”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사냥은 어디서 하시려오?”하니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 봉주(鳳州)에 가서 초도로 들어갈까 하오”라고 대답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들었는데 어찌 하여 강을 건너가려 하오?”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은 활쏘기, 사냥질을 일상적인 일로 삼는데 이것은 황제께서도 아는 바라 공이 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 뿐이오. 만일 사냥하고자 한다면 하필 그쪽으로 건너 가서야만 즐길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몽가독은 “만약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내 혼자서 당하리다”라고 하니 김방경이 “내가 여기 있는 한, 관인이 어떻게 강을 건너갈 수 있겠소! 만약 기어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황제께 말하여 승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가만히 지보대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물러가라고 하였더니 몽가독이 김방경의 충직성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김방경을 크게 존경하고 존중히 여겼으며 사실대로 일러 주면서 말하기를 “왕경(고려를 의미함)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어찌 다만 최탄 등 뿐이겠소. 또 다른 사람도 있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아무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비밀에 붙였으므로 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라는 그 때문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7/08 20:21 (from:211.57.153.114) 조회 : 36
■ 여름캠프2003 (09-1)---충렬공의 만년행적1 (동녕부를 되찾기 위하여)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김성호, 월간조선사)>
p303
천손 단군이 동이시조가 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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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 즉 안악, 은율, 신천, 송화군은 김유신의 석문패전에 이은 문무왕의 김유신 암살로 신라가 끝내 차지하지 못한 곳이다. 이중 하나인 안악군 구월산에 三聖祠(삼성사)가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남평양(재령)으로 천도(343년)했을 때,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안악고분(357년)에 모시면서 이 일대를 성역화하려고 안악고분의 주맥인 구월산 삼성사에 고구려 고씨 시조 단군을 봉안한 것이다.
그후 신라가 안악을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삼성사는 고구려 멸망후 아무런 병화도 입지 않고 고스란히 잔존하다가 고구려 계승을 발표한 고려 현종9년(1018년)에 안악군이 설치됨에 따라 [고려사] 지리지는 "구월산 장장평의 삼성사에 환인,환웅,단군이 봉안되었다" 고 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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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성호)는 종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단군을 말하지 않아 형편없는 사대주의 儒生으로 여겼었지만, 단군은 동이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군 : 청주한씨 시조, 한씨족(=일본인)의 시조 천손 단군
***동이족 : 동이시조 소호김천씨는 신이 아니라 신라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어서 시조였던 것이다.
단군신화는 일연선사의 [삼국유사](1283년) 첫머리에 인용된 [古記]에 전해오며, 선사보다 169년 전에 김부식도 이 古記를 보았다. 허나 김부식은 삼국사기(1114년)를 쓰도록 하명한 인종에게 올린 이 책 서문에서 ----- 고 하여 古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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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숙종3년(1098년)에 제작된 古記의 저자는 비록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안악군 삼성사를 관할하던 평양부의 한 문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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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가 지난 묘청반란 진압후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아마 이때 인종은 평양인이 저작한 古記에 버금가는 역사서를 쓰도록 하명함에 따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古記를 지목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이러한 단군논쟁의 와중에 혜성처럼 끼어든 인물이 일연선사였다. 그의 삼국유사는 최남선씨의 지적처럼 선사가 "78세때인 1283년에 국존"으로 제수될 때 완성되었다.
선사는 그 서문에서 ----- 라 하여 김부식을 정면으로 공박하면서 김부식의 사문난적으로 낙인찍은 古記를 삼국유사 첫머리에 버젓이 인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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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일본원정용 선박을 건조하는 한편 원군과 결사항전을 벌였던 삼별초와의 싸움에 시달리던 내우외환의 위기였다. 바로 이때인 원종10년(1270년) 에 서북면절도사 최탄과 삼화현교위 이연령이 평양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고을을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하니, 원군은 즉각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황해도 멸악산맥 이북을 강점해 버렸으니 어처구니 없는 영토의 피탈이었던 것이다.
당시 원나라는 아마 한사군 이래의 연고권을 앞세워 평양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했을 터이지만, 고려측 정사인 삼국사기는 평양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음에 따라 동녕부에 대항할 아무런 반증자료를 갖지 못함에 따라 평양을 멀쩡하게 원나라에 뺏길 판국이었다.
바로 이 시기인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古記의 고조선을 인용하면서 10개의 주석을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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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지명들을 가급적 동녕부가 장악한 평양일대로 집중시켜 동녕부가 차지한 영역은 낙랑군 이전부터 고려의 전신인 고조선이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사가 단군신화를 책 머리에 수록한 의도는 실은 동녕부가 차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선점권의 선포였고, "원나라여! 평양 땅을 내놓고 빨리 물러가라!"는 영토반환 요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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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선사는 김부식이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고기를 책머리에 인용하고서도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삼국유사를 완성한 바로 그해(1283년)에 승려로서 최괴직인 국존으로 제수되었던 것이다.
李承休(1224-1301)도 제왕운기(1287년) 상권에서 중국의 역사를, 하권에서 고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칠언한시로 읊으면서 압록강-두만강을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라 했으니, 이것 역시 압록강 이남의 동녕부는 물러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 김항용 -
▣ 김태도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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