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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오등제후의 으뜸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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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1-12-13 01:27 조회1,6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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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1년 11월 11일 문온공파의 영환대부님 주선으로 경기도 포천군 금수정(양간공 승택, 상락군 묘, 문온공 구용의 설단 지)에서 그동안 인터넷상에서만 만나뵙던 존경하옵는 대부님. 아우님. 조카님 몇분들과 감격적인 상견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영환대부님께서 삼척시에서 발행한 "국역 動安居士集"(附 帝王韻紀) 金慶洙, 秦星圭 譯 중 旦暮賦(단모부) 복사본을 주시면서 충렬공께서는 오등제후 중 최고의 작위인 공작의 작위를 생전에 받으셨음을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 때 그 말씀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그동안 무지해도 너무나 무지했음에 아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말씀이 부싯돌이 되어 文溫公派 壬申世譜,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시대 봉작제연구(김기덕 지음)을 참고하여 忠烈公(方慶)을 중심으로 한 우리 先安東金門의 封爵(君)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世譜上 封爵(君)되신 先祖는 대략 다음과 같이 13분이신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1. 利請(이청) : 上洛君 - 충렬공의 高祖(고조)

2. 孝綬(효수) : 上洛伯 - 尙書僕射公(상서복야공, 敏成)의 四子. 충렬공의 숙부.

3. 孝組(효조) : 上洛候 - 尙書僕射公(상서복야공, 敏成)의 五子.(막내). 충렬공의 숙부.

4. 方慶(방경) : 上洛郡開國公(忠烈公, 강종 원년 1212년 ∼ 충렬왕 26년 1300년)

5. (흔) : 上洛君(大將軍) - 충렬공의 次子. 고려사 열전 襲封(습봉) 上洛公(상락공)으로 기록되어 있음.

6. 恂(순) : 上洛君(文英公) - 충렬공의 三子.

7. 承澤(승택) : 永昌君(양간공), 충렬공의 손자, 昴와 冕의 父 - 도평의공파

8. 永暾(영돈) : 上洛府院君(文肅公), 충렬공의 손자. 문영공의 長子.

9. 永煦(영후) : 上洛候, 문영공의 四子.

10. 厚(후) : 上洛君, 충렬공의 증손. 승용의 장자. → 군사공파.

11. 昴(묘) : 上洛君, 충렬공의 증손. 승택의 장자. → 문온공파.

12. 縝(진) : 上洛伯. 충렬공의 증손. 영돈의 장자. → 제학공파.

13.  (천) : 上洛君. 충렬공의 증손. 영후의 장자. →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 永濡(영유) : 鵝林君(아림군), 永星(영성) : 閤門祗候(합문지후), 永奎(영규) : 隋城伯〈수성최씨〉은 열외함.



봉작(군)은 왕실이나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주는 작위로서 (國, 郡)公. (縣)候. (縣)伯. (開國)子. (縣)男으로 구분되며, 경제적인 대우로 食邑(식읍)과 祿俸(녹봉)을 수여(봉군제에서는 녹봉만 지급)하여 귀족적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작은 당대에 한하였으며, 상속되지 아니한 반면 봉군은 상속이 되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군 흔의 襲封(습봉) 상락공은 상락군과 사이에 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었습니다.



참고로 上洛(상락)은 동국여지승람이나 다른 서적에 상락이라는 邑戶(읍호)는 없으나 지금의 풍산이 옛날의 상락이고 또 상락진이 풍산에 있어 대개 낙동강의 상류를 상락이라 하고 선대 封號(봉호)도 상락이라 하였다고 임신세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봉작(군)제는 원나라 간섭이전의 봉작제와 원나라 간섭이후의 봉군제로 구분할 수 있으며, 봉작제는 충렬왕24년 충선왕에 의해 봉군제로 바뀌었다가 공민왕 5년 부활하였고, 11년 폐지되었다가, 18년 다시 부활하였고, 21년 다시 폐지되었습니다.(원 간섭기의 폐기시에는 봉군제임) 따라서 위의 충렬공의 고조이신 利請(이청)公의 상락군은 상락공 또는 다른 원인으로서의 오기일 것으로 추정되는 바 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봉작(군)제는 종실봉작제, 이성봉작제, 종실봉군제, 이성봉군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공훈있는 신하에게 수여하는 이성봉작(군)제에 대해서만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성봉작 기록은 고려 경종 5년에 처음 나오는데 고려사절요 권1에 "이해에 崔知夢(최지몽)을 大匡內議令(대광내의령) 東來郡候(동래군후) 식읍 일천호 上柱國(상주국)으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고, 이성봉군은 충렬왕 31년 李淑(이숙) 平昌君(평창군)의 封君이 처음입니다. 여기서 상주국은 功臣號(공신호)로서 정2품 勳階(훈계)이고, 주국은 종2품 훈계를 나타냅니다 또한 이성에 대한 봉작명에 있어서 李資謙(이자겸)의 朝鮮國公(조선국공)을 제외하고는 國(국)名을 띤 예가 없으며, 이성의 경우에는 郡(군)이나 縣(현)명을 봉작해 주었을 뿐입니다.



기록상 最高(최고)의 爵位(작위)인 公爵(공작)의 봉작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종대 李子淵(이자연) : 邵城伯 →慶源郡開國公 ※ 소성은 현재의 인천을 이름.

2. 인종대 金景庸(김경용) : 樂浪郡開國伯 → 樂浪郡開國候 → 樂浪郡開國公

3. 인종대 李瑋(이위) : 桂陽郡開國伯 → 桂陽公

4. 인종대 李資謙(이자겸) : 邵城候 → 漢陽公 → 朝鮮國公

5. 고종대 崔忠獻(최충헌) : 晉康郡開國候 → 晉康公

6. 고종대 崔瑀(최우) : 晉陽候 → 晉陽公

7. 崔沆(최항)은 여러번 봉작해 주었으나 사양하여 사후에 眞平公(진평공)에 追贈.

8. 원종대 金俊(김준) : 翼陽郡開國伯 → 海陽候 → 海陽公

9. 충렬왕대 金方慶(김방경) : 上洛郡開國公

10. 충렬왕대 洪君祥(홍군상) : 益城候 → 臨安公

11. 충렬왕대 宋 (송분) : 樂浪公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작의 작위를 생전에 받으신 분은 열분이시고, 進封(진봉)되지 아니하시고 초봉으로 공작의 작위를 받으신 분은 충렬공(방경)과 송분 두분이신데 충렬공께서는 충렬왕 9년에 봉작되셨고 송분공은 충렬왕 29년에 봉작되셨으므로 우리 충렬공께서 20년 일찍 봉작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종대 김경용, 이위, 이자겸은 功勳(공훈)보다는 반대세력 숙청, 왕실의 외척 등 국왕과 관련 주관적으로 봉작되었고, 최충헌, 최우, 최항, 김준은 무신정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며, 또한 고려조의 명신 명장으로 이름난 최승로(후작), 강감찬(후작), 윤관(백작), 김부식(후작) 등은 공작 아래 작위인 백작. 후작에 머무르셨으니 우리 충렬공(방경) 할아버지의 공작의 봉작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다 하겠습니까?



고려사 권제104 열전 제17과 고려사 권제31 세가31의 충렬공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忠烈王 九年 今封 上洛郡開國公 食邑 一千戶 食實封 三百戶(충렬왕 9년 금봉 상락군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 충렬왕 9년(1283년, 72세 ) 상락군개국공 식읍 1천호를 봉하여 실봉 3백호를 먹게 하 였다."

○ 忠烈王 二十一年 上洛郡開國公 食邑 三千戶 食實封 三百戶(충렬왕 21년 상락군개국공 식읍 삼천호 식실 봉 3백호) 충렬왕 21년(1295년, 84세. 충렬공께서는 1300년 89세에 돌아가셨음)

그리고 고려사 권제104 열전 제17에 우리 先安東金門 선조에 대한 봉작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김 묘 : 子昴 上洛君(자묘 상락군) - 그(승택)의 아들 묘는 상락군이 었고, . . . . .

○ 김 흔 : 襲封 上洛公(습봉 상락공) - 아버지(충렬공 방경)의 뒤를 이어 상락공으로 봉했으므로 (원나라 로 부터)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 김 순 : 忠宣王起爲重大匡上洛君(충선왕기위중대광상락군) - 충선왕이 그를 등용하여서 중대광 상락군 으로 삼았고,

○ 김영돈 : 曹 之亂 侍從有勞策勳爲一等 賜推誠秉義翊贊 號封上洛府院君(조적지란 시종유노책훈위1등 사 추성겸의익찬 호봉상락부원군) - 조적의 반란 때 왕을 시종한 공로가 있어 추성병의 익찬공신 의 칭호를 받았고 상락부원군에 봉해졌다.

○ 김영후 : 初封 福昌府院君 後封 上洛候(초봉 복창부원군 후봉 상락후) - 처음에는 복창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나 나중에 상락후의 봉호를 받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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