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진천 일송정(一松亭) 03---진천 입향조 생원공(휘 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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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16 03:41 조회1,815회 댓글0건본문
<일송종회 직계 선조님 요약>
□안렴사공 士廉(사렴) 1335~1405
□2세손 좌랑공 湜(식) <6남1녀중 6남> ?1375~ , 조봉대부(종4품)행이조좌랑
□3세손 직장공 自麗(자려) <3남6녀중 1남> ?1395~ , 승훈랑(종7품) 직장
■4세손 생원공 鄰(린) <5남2녀중 3남> ?1425~ , 문종조(1450-1451) 생원, 진천현감
///비슷한 시기에 문온공파 自均(자균) 진천현감
□5세손 사직공 亨孫(형손) <2남2녀중 2남> ?1465~ , 부사직(종5품)
□6세손 圻(기) <2남1녀중 1남> 1493~1568 壽76, 어모장군 부사정(종3품)
///안렴사공파 公亮(공량)의 1자 浣(완, ?1502~) 진천현감, 완의 아들 忠男(충남,1530∼1618)은 퇴계의 문인
///퇴계선생 42세(壬寅年, 1542년) 3월 30일, 충청어사로 충청도 일원을 다닐때 음성을 거쳐 진천현에서 묵고 남쪽에 있는 정자 연정에서 작은 모임을 가지면서 <진천동헌>, <연정소집> 시를 읊다.
□7세손 孝曾(효증) <3남3녀중 1남> ?1523~ , 창신교위(종5품)
///弟 孝騫(효건) 1592임란 의병
□8세손 鉉(현) <2남1녀중 2남> 1556~ , 병절교위(종6품)
///四寸 適(적) 1564~ , 輿地에 말하기를 江亭이 고을 서쪽 5리에 있고 주인 정랑 김적이 文翰의 사람에 지나고 지조가 굳고 확실하여 혼조를 당해서 명리를 사양하였다. 호는 牛川이다
□9세손 廷佶(정길) <6남1녀중 1남> 1577~1650 壽74, (왜란 12세?), 贈통훈대부(정3품) 군자감정
///1616년(?1653년) 양성인 이득곤(1587-?)이 縣西10리 甲子村(斗建里) 현재의 백곡저수지 속의 거듭된 언덕과 겹쳐진 고갯마루가 우뚝 솟아올라 둘러싸 사방이 막혔는데, 그 가운데는 평야가 넓게 펼쳐지고 큰 내가 깊은데 흰 모래가 평평히 펼쳐지고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벌려져 있던 곳에 식파정을 세웠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이 7월 초순에 말에 걸터앉아 고삐를 드날리며 와서 식파정기를 찬하고 시를 읊었다. 이 외에도 정혁, 송시열, 최명길(1586-1647), 채지홍, 채익선, 벽오 이시발, 채진형 등의 식파정 제영이 전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현종(顯宗) 6 년(1665)에 송강정철 묘소가 당초에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京畿道 高陽郡 元堂面)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로 정하고 정철신도비를 찬하였고, 그의 후손 정양(鄭樣)가 이장하였고 사우도 건립하였다.
□10세손 莯(목) <6남1녀중 6남> ?1617~ , 贈통정대부(정3품) 공조참의
□11세손 世鍊(세련) 초명 克鍊(극련), <2남중 1남> 1650~1715 壽66, 贈가선대부(종2품) 한성부좌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
///1707년 증조부 휘현 사촌 정랑공(휘적) 묘비 건립되고 있다.
□12세손 光國(광국) <3남2녀중 3남> 1690~1763 壽74 (교지 壽84), 가선대부(종2품) 동지중추부사
///1728이인좌의난, 兄 光龍(광룡) 일문사충 글
///1743년 증조부 (휘정길) 묘비 건립
□13세손 致恒(치항) <1남> 1726~1768, 통덕랑(정5품)
□14세손 錫武(석무) <3남중 2남> 1753~1783
□15세손 漢赫(한혁) <1남> 1776~1846
□16세손
///안렴사공파 思兢(사긍)은 1874년(高宗11) 增廣 進士급제하였으며, 회인현감을 지내고 거사비가 전해오며 끝으로 진천현감을 지냈다
///1894년 익원공파 백범 김구, 보은 장내리에 있는 동학 접주 최시형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진천 광혜원 장에 들렸다.
///1943년 백곡저수지 축조 (동양 최초의 싸이폰식)
///1983년 백곡저수지 제방증축
■ 4세손 생원공 金鄰(김린)
<족보> 生員 墓鎭川長管里石花洞卯坐 配흥해배씨 墓雙封
1. 형제자매
父 自麗자려는 안렴사공(휘 士廉사렴)의 손자로 (종7품)直長을 역임하였고, 배위 천안전씨(父 부사 全卿전경)와 사이에 5남(郤극, 擲척, ▶鄰린, 려:麗+우부방, 節절) 2녀(吳彰오창, 朴幹生박간생에 출가)를 낳았다.
兄 극은 生員으로 大邱(종6품)敎授를, 子 奉孫봉손은 龍宮(종6품)縣監을, 孫 守賢수현은 瑞山(종4품)郡守를 역임하였고, 충북 영동 황간 회포리 우천리, 대구시 시내 등지에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대구 지방의회의원 元會와 아들 태화 태근 태우(현 국방연구원 연구위원, 핵물리학 전문가) 태정, 대종회 활동 國寶(在國), 안양 국회의원 입후보 在禮와 喆會(현 안양 민주평통위원장), 貞會(현 황간향교 전교, 우천리 연화동 거주)등은 그 후손이다.
兄 척은 무후하고,
弟 여는 (종6품)縣監을, 子 鐵壽철수는 武 (정3~종9품)宣傳官을, 孫 石齡석령은 濟州(정3품)牧使를 지냈으며, 曾孫 瓘관은 生員이며, 추풍령 인근 경북 김천시(옛 금릉군) 봉산면 광천리 너리골(廣洞)과 김천시 시내, 충북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등지에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弟 절은 錄事를 지냈으나 무후하다.
2. 배위와 자녀
묘는 진천 장관리 석화동에 있고 배위 흥해배씨와 쌍분이다. 흥해배씨와의 사이에 2남(允孫윤손, ▶亨孫형손) 2녀(許衡허형에 출가, 尹愼孫윤신손에 출가)을 낳았다.
3. 생원공 金鄰(김린) 행적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증손 김린이 문종조(1451-1452) 生員으로 鎭川(종6품)縣監을 지냈다. (정6품)監察 김린이 진천읍 장관리로 입향하여 사백여년 그 자손이 세거한 이래 많은 충효가 계출하여 번연하고 있다. <상산인맥지>
린 선조께서 현감을 역임하는 비슷한 시기에 우리 문중의 문온공파 후손이신 자균 선조께서 역시 鎭川(종6품)縣監을 역임하고 진천군 이월면 신월리로 입향하여, 현재 신월리에는 그의 묘가 있으며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김사렴-김 식-김자려-김 린
---김구용-김명리-김계우-김자균
(안렴사공파) 린 : 문종조(1450-1451) 생원으로 진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문온공파) 자균 : 명리의 아들 맹헌, 중서, 계우 3형제중 막내 계우의 아들이다. 맹헌은 1426년에 식년시(式年試) 同進士1, 계우는 1436년에 친시(親試) 同進士1로 급제하였다.
◆초시(初試), 생원(生員), 진사(進士)◆
1) 초시(初試)
일종의 생진과(生進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시험이다. 각도(各道) 감영(監營)에서 행하는 향시(鄕試)나 중앙에서 실시하는 생진과 초시(生進科初試)를 조흘강(照訖講)이라 한다. 이 조흘강에 급제(及第)하면 ◆초시(初試)라 부르고 조흘첩(照訖帖)을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 생진과(生進科)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다.
초시는 식년시(式年試)의 1년 전인 인,신,사,해(寅,申,巳,亥)년 가을에 본다. 초시에서는 경서(經書)를 암통(暗通, 암기)하게 하고 거기에 대한 뜻을 물어 보는 시험으로, 시험관(試驗官, 시험관독관)이 응시자를 불러 경서(經書)를 외우게 하고, 잘 외우면 통(通) 2점, 약(略) 1점, 조(粗) 반점(0.5), 불통(不通) 0점으로 열 번(10번) 의 암통을 하여 20점 만점에 14점 이상을 급제로 하였다.
2)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서울과 각 지방에서 조흘강에 급제한 사람을 상대로 하여 과거를 보는데 생진과(生進科) 또는 소과(小科)라 하고 자,묘,오,유년(子,卯,午,酉年) 3년에 한번씩 보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 한다. 생진과(生進科)는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는 관찰사(觀察使)가 차사원(差使員)을 보내 시험관을 삼고 이들이 임석(臨席)한 가운데 감찰(監察)들로 하여금 차작차필(借作借筆, 부정행위)을 못하게 엄중히 단속하는 한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과목(科目)을 내고 운자(韻字)를 정하여 시(詩)를 짓게 하는데 시간을 엄격히 제한했다. 응시자들은 각자 준비된 묵필(墨筆)로 시를 지어 장지(壯紙)에 18수(十八首)를 써서 봉투에 넣고 봉하여 시험관에게 제출한다. 시험이 끝나면 시험관들은 그 시축(詩軸)을 모아서 채점을 한다.
글을 잘 지었으면 상상(上上) 9점, 상중(上中) 8점, 상하(上下) 7점, 이상(二上) 6점, 이중(二中) 5점, 이하(二下) 4점, 삼상(三上) 3점, 삼중(三中) 2점, 하하(下下) 1점으로 9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리하여 이하(二下, 4점)이상을 택하여 급제로 정했는데 그 선발 인원은 한성시(漢城試) 200명과 각 향시(鄕試)에서 경기 60명, 충청 90명, 전라 90명, 경상도 100명, 강원 45명, 평안도 45명, 황해도 35명, 함경도 35명, 모두 700명이다. 이들을 ◆생원(生員)이라고 불렀다.
2차 시험인 복시(覆試)는 초시 합격자들을 서울로 불러 보았는데 시험과목은 초시와 같았으며 시험관은 종이품관(從二品官)이상이었으며 성균관 박사(교수) 이하의 관원과 예문관(藝文官),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의 7품관 이하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감독하였다. 선발인원은 100명이었고 이들을 ◆진사(進士)라 하였다.
이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게 되었다. 이 생진과(生進科) 복시(覆試)에 급제한 자는 대과(大科) 즉 문과(文科)에 응시자격을 주었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을 허가하였으며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을 ◆태학(太學)이라고 불렀다.
▣ 김태도 - 조선조의, ㅡ생원. 진사 ㅡ 선발과정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진천 입향조 린, 그 이후의 가계 정리, 참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셨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안렴사공파 란의 하단 소파란에 올리겠습니다.
▣ 솔내 -
▣ 김윤만 - 공부 잘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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