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진천 일송정(一松亭) 04---사직공 (휘 亨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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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16 23:15 조회1,579회 댓글0건본문
■ 5세손 사직공 亨孫(형손)
<족보> 字達可 副司直 忌正月六日 墓石花洞卯坐 配安東權氏(父悰 祖都摠制邦緯 曾祖領相仲和)
1. 형제자매
부 생원공 鄰(린)과 모 흥해배씨와의 사이에 2남 2녀중 (允孫윤손, ▶亨孫형손, 許衡허형에 출가, 尹愼孫윤신손에 출가)중 2남으로 태어났다.
兄 允孫윤손의 子 元은 副司直부사직(종5품)이며, 후손은 진천 사석리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1728년 이인좌의 난때 의병을 모아 진천관아를 습격하다 순절한 一門四忠일문사충 天章천장, 天柱천주, 聲玉성옥, 聲秋성추, 6.25 전사 善默선묵, 榮國영국과 진천종친회장 榮照영조, 榮萬영만, 현 진천군수 慶會경회(보명 奉會봉회), 충주보건소장 相會(상회), 현 변호사 良男양남(보명 良默양묵), 부장검사 변호사 容黙용묵1922~, 대학교수 在連재련1944~, 과기원 연구관 在德재덕1955~, 등은 그 후손이다.
누이 한분는 양천인 許衡허형에 출가하였는데. 2녀(趙環조환에게, 감사 尹儼윤엄에 출가)를 두었다.
2. 배위와 자녀
字는 達可(달가). 副司直(종5품)이며, 忌는 正月六日이다. 墓는 진천 장관리 石花洞 卯坐에 있다. 配는 安東權氏로(부 悰종, 조 都摠制 邦緯방위, 증조 領相 仲和중화) 영의정 權仲和(1322~1408)의 증손녀이다.
배위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2남(▶圻기, 堞첩) 1녀(金益堅김익견에 출가)를 두었다.
◆ 권중화(權仲和 ,1322∼1408)와 우리 가문 ◆
○ 1353년(공민왕 2)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안렴사공(휘士廉, 1335~1405)은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822년 남공철 찬 고려명신전>, 1358년 비서감(정3품)을 지내고 있음을 볼때 <1358년 이색 찬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권중화(權仲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안렴사공(휘 士廉) 4남 성균학생 김제는 1377년(우왕3) 3월 진사과에 등제하였다. 이때 권중화가 과거시험을 주관한 듯하다. 당시 김제의 父 士廉은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이었다.
○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김사형(金士衡)은 안렴사공(휘 士廉)의 막내동생이다.
■ 디지털한국학
권중화(權仲和)
1322(충숙왕 9)∼1408(태종 8).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의료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이다.
1353년(공민왕 2)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하여 조선초에 고려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으며,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하여 의약·지리·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朝鮮金石攷, 槿域書畵徵, 國朝人物志,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申解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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