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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안동김씨(安東金氏)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인 생원(生員) 김의문(金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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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7-19 23:56 조회1,719회 댓글0건

본문

오랫만입니다.



그간 궁금했는데 이렇게 방문하시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질문하신 선조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척약재(김九容)--1.김명선 [2.김明理] 3.김명윤--1.김맹헌,2.김중서 [3.김季友]--[김自均].2김자숙



--1.김석문-진사-. [2.김義文-생원-].3.김익문-진사-



金義文=生員 配=양성이씨 父 大卿 李貴孫



子=無 女=사위-李 蓂-禮安人, 左相, 정간공, 호 東皐



金自均=진천현감공

김계우=의정부 사인공

김명리=성천도호부사공

김구용=문온공, 호 척약재, 歷 판전교시사, 성균관대사성



이상과 같습니다.

다른 의문사항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성의껏 찾아드리겠습니다.



김영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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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1574년(선조 7) 대제학(大提學) 김귀영(金貴榮 : 1520 ∼ 1593)이 지은 좌의정(左議政) 동고(東皐) 이명(李蓂)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의하면,

이명(李蓂)의 부인(夫人)이 안동김씨(安東金氏)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인 생원(生員) 김의문(金義文)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인 생원(生員) 김의문(金義文)에 대한 내용도 아울러 부탁드립니다.



아래는 좌의정(左議政) 동고(東皐) 이명(李蓂)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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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이공 신도비명(左議政李公神道碑銘)





공(公)의 휘는 명(蓂)이요 자는 요서(堯瑞)이며 예안인(禮安人)이다.

그 선대(先代)에 휘 도(棹)는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평정(平定)하였는데 그 공(功)으로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 후 휘 익(翊)은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휘 변(日+弁)은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휘 송(立+束)은 군부판서(軍簿判書)로 당세(當世)에 혁혁(赫赫)한 관위(官位)을 차지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온(온)은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고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공에게 증조(曾祖)가 된다. 조부(祖父)는 군자주부(軍資主簿) 휘 신(愼)인데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었고 아버지는 연산현감(連山縣監) 휘 보간(輔幹)인데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공의 직위(職位)의 귀(貴)함으로 인한 은전(恩典) 증직(贈職)이었다.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는 해평(海平)의 명망(名望)높은 집안인 감찰공(監察公) 휘 혼(渾)의 딸이며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외손(外孫)이기도 하다.



홍치(弘治) 병진(丙辰:1496/연산군 2)년 4월 19일에 공이 태어났는데 공은 천품(天稟)이 단아(端雅)하고 총명(聰明)하여 어려서부터 보통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으니 의정공(議政公)이 늘 말하기를 "우리집안에 비로소 정승(政丞) 감이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성장할수록 더욱 학문에 노력하였다. 갑술(甲戌:1514/중종 9)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신사(辛巳:1521/중종 16)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와 제사(祭祀)는 모두 고정가례(考亭家禮)대로 시행하였다.



가정(嘉靖) 을유(乙酉:1525/중종 2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무자(戊子:1528/중종 23)년에 문과(文科)에 발탁되어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봉교(奉敎)에 승진되었고 신묘(辛卯:1531/중종 26)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가 병조(兵曹)와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병신(丙申:1536/중종 31)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中國)을 왕복하였는데 모든 행동(行動)이 중용(中庸)을 얻었다. 정유(丁酉:1537/중종 32)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고 곧 이어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제수(除授)받았다가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으로 옮겼고 무술(戊戌:1538/ 중종 33)년에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교리(校理)를 거쳐 응교(應敎)로 옮겼으며 얼마 안되어 집의(執義)로 임명되었다. 기해(己亥:1539/중종 34)년에 함경북도(咸鏡北道)에 큰 흉년(凶年)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니 조정(朝廷)에서 구휼관(救恤官)을 파견(派遣)하려 하였으나 적격자(適格者)를 선임(選任)하기 어려웠는데 대신(大臣)들이 공을 추천(推薦)하였다. 공은 명을 받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서 계획을 세우고 응급조처(應急措處)를 하여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었다. 공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당시(當時)의 재상(宰相)들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여 미움을 받고 끝내는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백성을 잘살게 해주고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계묘(癸卯:1543/중종 38)년에 병(病)으로 인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갑진(甲辰:1544년/중종 39)년에 또 다시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제수(除授)되어 홍주목사때보다 성가(聲價)가 높으니 내직으로 전한(典翰)에 임명되고 얼마 안되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여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로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기(李기)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서 사류(士類)들을 죽이기도 하고 귀양도 보내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공은 분발(奮發)하여 자신의 위태로움은 생각하지도 않고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과 정의(正義)를 앞세워서 그를 배척(排斥)하니 이로 인하여 횡포(橫暴)가 조금 좌절(挫折)되었다.



기유(己酉:1549년/명종 4)년 봄에 어명(御命)으로 전후임(前後任)의 강관(講官)들을 소집하여 대궐(大闕) 안에서 연회(宴會)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공은 경연(經筵)에 오래 있으면서 보도(輔導)한 공도(功導)가 많다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더하였다. 여름에는 중국(中國) 황태자(皇太子)의 부음(訃音)이 들리자 진위사(陳慰使)로 중국에 가는 도중에 광녕(廣寧)에 이르러 병(病)으로 눕게 됨에 도어사(都御史)가 가마꾼을 동원하여 호송(護送)하였으니 그것은 공의 대화관계(對話關係)가 원활하여 애경(愛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술(庚戌:1550/명종 5)년에 겸 동지 춘추관(兼同知春秋館)을 거쳐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자(壬子:1552/명종 7)년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직언(直言)한 일로 인하여 파면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왕(王)께서 당시의 풍속(風俗)이 날로 각박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청렴(淸廉)하고 근실(謹實)한 사람을 선발(選拔)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뽑히었다. 그래서 대궐(大闕) 안에서 연회를 베풀려하였으나 이때 공이 산관(散官:일정한 보직이 없이 관계(官階)만 보유하는 관원. 산계(散階)·산직(散職)이라고도 함)이었으므로 참석할 수 없었는데 특명(特命)으로 대사성(大司成)을 제수(除授)하여 참석시키었으니 이 영광(榮光)은 특수(特殊)한 경우(境遇)로서 옛날에도 그리 흔치 않던 일이었다. 계축(癸丑:1553/명종 8)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어 특진관(特進官)으로 왕을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가뭄이 극심(極甚)하였는데 왕께 아뢰기를 "천도(天道)를 순조(順調)롭게 하는 것은 민심(民心)을 기쁘게 해주는데 달려있습니다. 을사(乙巳:1545)년 옥사(獄事)때 억울한 사람이 사실상 많았으니 먼저 그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부터 풀게하여 천의(天意)에 순응토록 하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이때 권력(權力)있는 간신(奸臣)들은 을사사건을 두둔만 하면 역적(逆賊)을 두둔하는 행위라 하여 감히 이러한 말을 꺼내지도 못하던 때인데도 공은 거리낌없이 이러한 제안(提案)을 하였더니 공은 즉일(卽日)로 자헌대부 형조판서(資憲大夫 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니, 이 어찌 공의 충성심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感動)케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공은 얼마 안되어 이조(吏曹), 호조(戶曹),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보임(輔任)하였는데 언제나 중추부(中樞府), 경연(經筵), 금부(禁府)등의 직(職)을 겸임하였다. 정사(丁巳:1557/명종 12)년에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서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또 세자 빈객(世子賓客)을 겸임하였으며 기미(己未:1559/명종 14)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특승(特陞)되어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고 신유(辛酉:1561/명종 16)년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직하였으며 갑자(甲子:1564/명종 19)년에 대광(大匡)으로 승진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제수되었는데 평소의 덕행(德行)과 촉망(囑望)이 높아 누구하나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의정공(議政公)이 전에 이르던 말이 지금에 와서 들어 맞았으니 「아들을 아는 이는 아버지보다 나은 이가 없다」는 말이 틀림없이 징험(徵驗)되었다. 을축(乙丑:1565/명종 20)년에 공의 나이 70이 되자 사직(辭職)하기를 왕께 청원하였더니 궤장을 특별히 하사하였고 그해 가을 명종(明宗)께서 을사사건때에 죄(罪)받은 사람들의 명단(名單)을 보고하라 하였는데 그것은 억울함을 씻어 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그에 따른 논의(論議)가 일치하지 못하여 어떤 사람은 그 죄명(罪名)을 분등(分等) 구분(區分)하여 보고하자고 하니 이때에 공은 불가함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을사사건의 죄명은 모두가 적신(賊臣)인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이 꾸민것인데 지금 만약 죄명을 분등(分等)하여 보고한다면 이것은 그 죄를 사실화(事實化)하는 것이라는 불가론(不可論)으로 끝까지 버티었으나 실행(實行)되지는 못하였다. 병인(丙寅:1566/명종 21)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었지만 공은 병(病)을 이유로 여러번 글을 올려 은퇴(隱退)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럴때마다 왕은 허락(許諾)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우(禮遇)하기를 마지않았다.



정묘(丁卯:1567/명종 22)년에 명종(明宗)이 승하하시자 명나라에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할 무렵 당시의 시정기[時政記:당시의 정사(政事)·주대(奏對) 등을 뒤에 빙고(憑考)하기 위하여 적어 두는 일기(日記).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보관한다]를 보려는 자가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정원 일기(政院日記)가 있는데 굳이 사국(史局)의 기록을 볼 필요가 무엇인가? 그것은 후일에 폐단(弊端)을 남기는 계기(契機)만 된다" 라고 하였으니 모든일에 정밀(精密)하기가 이와 같았다.



선조(宣祖)께서 처음 경연(經筵)에 나오셨을 때 공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입시하였는데 권계(勸戒)하는 내용이 아주 간곡(懇曲)하고 정성(精誠)스러웠고 또한 왕께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효도(孝道)로는 선왕(先王)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말년(末年)에 을사사건(乙巳事件)때의 억울함을 분명히 아시고 그것을 복권(復權)하고자 하다가 결말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계술(繼述)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공론(公論)이 크게 일어나서 마침내 신원(伸寃)의 특전(特典)이 내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공의 힘이 아님이 없었다. 겨울에 공이 노병(老病)으로 인(因)하여 사직할 것을 간청하니 왕께서 "염치(廉恥)의 도리(道理)를 배양(培養)함은 마땅히 대신(大臣)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인데 경(卿)같이 충성스럽고 근실한 이는 마땅히 태보(台輔)에 오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받아드릴 수 없다" 고 하였다. 공이 대궐(大闕)에 나가 5일동안 간절하게 간청하니 왕께서 마지 못하여 윤허(允許)를 내리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임(遞任)시켰다. 얼마후 중풍(中風)의 증세(症勢)로 기동(起動)을 못하게되자 왕께서 태의(太醫)를 보내어 약물(藥物)을 하사(下賜)하고 문병(問病)하였다. 경오(庚午:1570/선조 3)년 가을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위훈(僞勳)으로 봉작(封爵)한 것을 삭파(削罷)하자는 제의(提議)를 왕께 청(請)하려 하였으나 앞설 사람이 없었다. 이 말을 듣고 공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 문제는 평소(平素)에도 늘 분통하게 여긴 것인데 한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즉시 상소(上疏)를 초안(草案)하여 올렸는데 내용(內容)이 아주 간절하여 보는 사람은 누구나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공이 질병(疾病) 때문에 국은(國恩)에 보답할 수 없다하여 녹(祿)을 받지 아니하였는데 왕께서 유사(有司)에게 명(命)하여 집으로 보내주도록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약물(藥物)을 권하니 거절(拒絶)하면서 하는 말이 "인간(人間)으로써 더 바랄것이 없다" 고 하더니 병세(病勢)가 위급(危急)하여지니 왕께서 태의(太醫)를 보내어 진찰(診察)을 하게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남기고 싶은 말을 듣고 오라 하였는데 그들이 도착(到着)한 즉 공은 벌써 운명(殞命)한 뒤였다. 그때가 융경(隆慶) 6년(1572/선조 5) 8월 초 6일이고 향년(享年)이 77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왕께서 못내 슬퍼하여 3일동안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관(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를 맡아 돌보아 주었고 이해 10월 기미(己未:6)일에 양주(楊州) 고을 해촌(海村)에 장사(葬事)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성격(性格)이 침착하고 몸가짐이 단정(端正)하여 경솔(輕率)한 말과 성급(性急)한 표정(表情)이 없었으며 친구(親舊)들을 사귐에도 정결(貞潔)하고 성실(誠實)함을 존중(尊重)하니 경향(京鄕)에서 모두 그 청엄(淸嚴)하고 근엄(謹嚴)함을 추중(推重)하였다. 4왕조(중종, 인종, 명종, 선조)에 벼슬하여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건만 집이 협소하여 겨우 용신(容身)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년(晩年)에는 더욱 조용한 곳을 좋아하여 집뒤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지어놓고 스스로 호를 동고(東皐)라 하였다. 공무(公務)를 마친 뒤에는 정자에 올라 거닐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소요(逍遙)하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명절(名節) 때처럼 주연(酒宴)을 베풀어 놓고 자질(子姪)들과 친구(親舊)들을 불러서 함께 마냥 즐긴 후에 자리를 파(罷)하였다.



아아 덕(德)과 나이와 작(爵)은 천하에서 한결같이 높여 보는 위치인데 공은 그것을 모두 겸(兼)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 위대할 수 있을까? 공은 생원(生員) 김의문(金義文)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거성(巨姓)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서 척약재(척若齋) 구용(九容)의 현손(玄孫)이다. 정숙(貞淑)한 덕행(德行)은 친척(親戚)들과 마을에서 흠미(欽美)를 받았으며 공의 뜻에 복종하여 재산을 늘리는 일을 하지 않은 관계(關係)로 때로는 남들로부터 물자(物資)를 꾸어오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신해(辛亥:1551년/명종 6)년 12월 공보다 먼저 고인(故人)이 되었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봉(追封)되었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응로(應老)이니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지냈고 맏딸은 강종선(康從善)에게 다음은 서대(徐垈)에게 끝은 현령(縣令) 남응서(南應瑞)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사섬시 정(司贍寺正)은 조방주(趙邦柱)의 딸을 맞이하여 2남을 두었으니 첫째인 성린(成麟)은 판서(判書) 정유길(鄭惟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인 성란(成鸞)은 승지(承旨) 안자유(安自裕)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사위 강종선(康從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복형(復亨)이니 지금 사산감역(四山監役)이고 딸은 참봉(參奉) 김홍간(金弘幹)에게 출가하였고 서대(徐垈)는 무후하고 남응서(南應瑞)는 4녀를 두었는데 맏딸은 사인(士人) 심효겸(沈孝謙)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장사(葬事)를 지낸 이듬해에 사자(嗣子) 응로(應老)가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와서 묘도명(墓道銘)을 부탁하니 내가 마침 공과의 지면(知面)이 있고 사자(嗣子)와도 잘 아는 터인지라 문장(文章)을 잘 쓸 줄 모른다는 이유(理由)로 거절(拒絶)할 수가 없었다. 삼가 그의 출계(出系)와 이력(履歷)을 정리(整理) 기록(記錄)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엮는다.



선곡(善谷)의 저 이씨(李氏)는 태사공(太師公)에서 비롯했고 그 기반(基盤)을 굳힌 이는 익(翊)과 변(日+弁)이 아니던가?

공(公)께서 계승(繼承)하여 더욱 빛을 내었도다.

옥(玉)같은 그 자질(資質)에 금(金)과 같은 기상(氣象)을 겉으로는 둥글둥글 안으로는 방정(方正)했네.

남이야 뭐라하든 내 할 일만 지켜 왔네.

4왕조에 신임(信任)받아 바람되며 구름되고 여러 관직 역임할제 노(楫)도 되고 비(霖)도 되었네.

수령(守令), 방백(方伯) 간 곳마다 송덕비(頌德碑) 세워졌고 그 명성(名聲) 조정(朝廷)까지 파다하게 알려졌네.

대의(大義)를 가다듬어 적신(賊臣)을 탄핵(彈劾)하니 흉(兇)한 칼날 그로 인(因)해 좌절하지 않았던가?

위험을 무릅쓰고 잘못된 점 변명(辨明)하여 억울함 죽음까지 통쾌(痛快)하게 신원(伸寃)했네.

어진 이의 강치(剛値)함은 온 백성(百姓)의 복(福)이로다.

스스로 만족(滿足) 않고 미련없이 용퇴(勇退)하니 탁월한 그 이념(理念)은 더욱이 어려운 일.

동고(東皐)에 집을 짓고 가난한 선비생활 대자연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었네.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함은 공같은 분 또 있을까?

양주(楊州)의 서쪽에 있는 해촌(海村의 언덕위에서 팔척(八尺)의 그 무덤이 군자(君子) 잠든 곳이라네.



대제학(大提學) 김귀영(金貴榮)이 지음.







▣ 김윤식 -

▣ 김우회 -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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