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도 자료 찾기-충렬공이 나오는 해동명장전, 오은 안렴사공 시장, 김응해선조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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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07-23 21:56 조회1,596회 댓글0건본문
<국립 중앙 도서관 자료찾기>
며칠 전 용주(안) 종친으로부터 고려대 심경호교수(현재 우암유집 번역중)가 제공한 정보 하나를 들었습니다. 조선조 영정조때의 학자요 문신인 홍양호가 지은 이계집(耳溪集) 속에 충렬공(휘 방경)의 신도비가 들어 있다는 제보입니다. 이에 그 사실 가능성을 두고 이리 저리 생각하다가 우리 홈 게시판의 문제 해결 등으로 하루를 미루다가 오늘 오후 주회 종친으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또 들었습니다.
폭염이지만 홈페이지 문제는 그 정도로 우선 접어 두고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검색대에서 홍양호를 찾았습니다. 그가 쓴 문집의 해동명장전 속에서 충렬공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신도비문을 찾기 위해 비문, 묘갈명, 신도비문의 목록을 몇 번이나 찾아보았으나 없었습니다. 아마도 해동명장전을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나타났습니다. 오은 안렴사공 김사렴 선조님의 시장(諡狀)이 권지 30에 실려 있었고 권지 38에는 여영대장 김응해 선조님의 묘지명이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날은 더웠지만 온 몸이 시원했습니다. 해당 내용을 복사한 뒤 서초역까지 걸어 가는 동안 약 15 여분의 뙤약볕은 한문을 한자 한자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는 나의 열기보다는 오히려 약해 보였습니다. 이를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홈에 올리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날은 더웠지만 제 맘은 아주 시원한 하루였습니다.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군수 중성(重聖)의 손자이고, 진보(鎭輔)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경모(敬謨)의 할아버지이다.
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거쳤고,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되면서 1781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어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평안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지냈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여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고증학(考證學)을 수용,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조실록》·《국조보감》·《갱장록 羹墻錄》·《동문휘고 同文彙考》를 비롯한 각종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 牧民大方》을 저술하였다.
특히, 1764년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일행에게 부탁하여 벚나무 묘목을 들여다가 서울 우이동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듬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이계집》 37권 외에 《육서경위 六書經緯》·《군서발배 群書發排》·《격물해 格物解》·《칠정변 七情辨》·《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 高麗大事記》·《흥왕조승 興王肇乘》·《삭방습유 朔方拾遺》·《북새기략 北塞記略》·《만물원시 萬物原始》·《향약절중 鄕約折中》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이 아순(雅馴)하고 전측(典則)이 있어서 당시 관각(館閣)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는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루상량문(北門樓上梁文)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양호 영정>
<홍양호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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