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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09---백부 金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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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4 00:05 조회1,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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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고종43), 충렬공 45세때 백부 문간공(文簡公) 김창(金敞, 초명 孝恭) 공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간공(김창) 께서는 최이(=최우) 무신정권시대의 권력자로 활동하시었으므로, 조카 충렬공(김방경)의 출사와 초기관직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간공은 아들이 없어 후손이 이어지지 못하였는데,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디지털한국학
김창(金敞)
○?∼1256(고종 4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효공(孝恭). 희종 때에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병부우승(兵部右丞)이 되었다.
○고종 때에 ★최우(崔瑀)에게 등용되어 정방에서 전선(銓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이때 이부·병부의 선발에 응한 자가 무려 수백명이었지만 한번 보고 그 이름을 다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우의 지시대로만 따른다는 비난도 받았다.
○1237년에 대복시사로서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었으며, 1242년에는 추밀원부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홍지경(洪之慶) 등 진사를 선발하였다. 그뒤 추밀원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최씨 집권자의 신임을 얻어 오랫동안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진퇴를 분명히 하여 육십이 되어서 재상이 될 정도로 청렴하였다.
○1256년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申千湜〉>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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