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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7---무고사건2 (1270년,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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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5 13:44 조회1,4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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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삼별초의 난 진압중 1270년 (원종11, 59세) 홍친, 홍기의 무고로 (★2번째 무고)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되기도 합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아해는 그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달로화적에게 공문을 띄웠더니 달로화적이 김방경에게 돌아오라고 하여 홍찬 등과 대질을 시켰고 참지정사 ★채정(蔡楨)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달로화적이 왕에게 말하기를 “홍찬 등이 말한 바는 허망한 일이니 이자들을 응당 감옥에 가두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방경을 석방하여 주었다.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 동문선 제40권 표전(表箋)  
알리는 글[告奏表]  김구(金坵)

군사를 주둔시켜 위엄으로 제재함은 대적할 수 없는 황위(皇威)를 신뢰하는데, 여러 날을 두고 오래 끄는 것은 대개 사율(師律)이 올바르지 못한 까닭이므로, 이에 간곡한 말씀을 아뢰니 우러러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사나운 저 반역의 도당이 먼 바다에 둔쳐 있음으로써, 토벌하는 관군을 번거롭게 하였지만, 우리 군사를 원조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니, 이제는 군사가 많고도 강하게 되었으며, 또한 흉한 무리도 항복 받고 없애기 쉽게 되었습니다.
소국의 통군참지정사(統軍參知政事) 김방경(金方慶)이 처음으로 해군을 단속하여 곧장 쳐부수려고 하였는데, 아해(阿海)원수(元帥)가 좋지 못한 놈들의 방자히 꾀는 말을 듣고, 즉시 방경(方慶)을 잡아서 왕경(王京 원 나라 서울)으로 압송하고, 그 설비한 병선(兵船)과 뽑아 훈련시킨 군인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다행히 다루가치를 만나서 그 실정을 조사해 본즉, 모두 터무니없는 사실이므로 곧 방경을 돌려보내어, 다시 병선을 갖추고 군인을 징집하여 지난해 11월 22일에 접전하는데, 우리 배 백여 척이 적선 30척과 상대하게 되자, 오직 방경의 장군 양동무(楊東茂)의 배가 먼저 들어가서 힘껏 싸우고, 아해(阿海)는 서로 구원하지 않고 물러서서 정세만 구경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못했던 것이며 지금까지 한갓 마초와 군량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실로 마음이 쓰라린 바옵니다.
무릇 조지(詔旨)를 받들고 사무에 분주하는 백성들도 모두 병소(兵所)에 나간 것은 하루 빨리 그 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자 함이요, 또한 오로지 칙조(勅條)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지난번 사건의 전말은 통역(通譯) 김원기(金元器)가 싸움을 목격하여 모두 아니, 불러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절차장군(節次將軍) 인공수(印公秀)의 아뢴 바도 아울러 통촉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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