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1---안렴사공 묘역과 송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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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10:47 조회1,912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묘역과 송천서원
(청원 오창면 모정리, 양지리)
1. 정간공(휘 永煦)과 증영삼사사공(휘 蕆) 설단
정간공의 아버지 문영공(휘 순)과 백형(휘 영돈)의 묘소가 개성에 있었고,정간공께서 고위관직에 계시어 개성 어딘가에 거주하셨을 것이므로 정간공과 영삼사사공의 묘소도 개성 인근 어딘가에 있다가 실전된 상태로 추정될 뿐, 기록도 전무하여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62년 정간공의 후손인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3파에서 합력하여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 묘역 좌하에 정간공과 영삼사사공 설단을 조성하였다가, 1993년에 중수하고, 1996년 묘역 좌상으로 이설하였다가, 2000년 수해로 인하여 다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고려의 충신 안렴사공(휘 士廉)
○ 1335~1405 <1708 송천서원 건립시 문헌자료, 양촌집 '1403 회목과 회약' 참조>, 贈영삼사사공(휘 천)과 贈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곽원진의 따님)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 어려서부터 學問에 뜻을 두었고 文詞에 富하여 공민왕(재위 1351~1374) 초에 登第하여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直諫으로 善俱하여 著名하였다. <1592이전 편찬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신현 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는데, 여말에 김사렴을 비롯해서 많은 충신 열사들이 배출되었던 것도 이분의 높은 가르침에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1860 화해사전>
○ 1358년(공민왕7)에 비서감(정3품)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공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이때 공도 폄출(좌천되어 유배됨)된 듯하다. <1822 고려명신전>
○ 1377년에 朝議郞(종5품) 佐司諫 知制誥를 지내고, 당시(1382년) 4자 도절제사 김제, 척약재(휘 구용)의 1자 서령 金明善이 동방급제하였다. <1377 고려 진사방목, 1382 고려 문과방목>
○ 벼슬이 문하시랑 정당문학 안렴사에 이르렀다. <1534 모재 김안국찬 (5대손)김지 묘갈명>
○ 공은 외모에서 풍채와 위엄이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마음 씀씀이가 크고 넓었으며, 공직에 나아가서는 오직 충절로 신명을 다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아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쳤다. (風采嚴威 器度弘傅 奉公以誠 按民盡力 名重當世) <조선명신록, 해동인물지)
○ 또한 공은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마음심)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마음심)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 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공(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가니 그 아우 석루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하면서, 운곡 원천석에게 역동 우탁 가문과 불훤재 신현 가문이 화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1860 화해사전>
○ 여말선초의 역성혁명기에 청주(淸州)에 은퇴, 공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공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1822 고려명신전>
○ 배위 죽계부인 순흥안씨(父안원숭, 祖안목, 曾祖안자기?안우기, 高祖안향, 外祖원선지)와의 사이에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다. 처부 안원숭은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데 맏사위가 안렴사공이고, 기전룡, 성석린 등이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안렴사공파세보>, <순흥안씨 홈페이지>
3. 안렴사공 묘소
안렴사공(휘 사렴, 1335~1405)공은 임종이 다가오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며 유언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보존치 못하였고,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왕과 조상님들을 뵐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우리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했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1822년 고려명신전, 남공철(1760~1840)>
공의 이 유언은 그 자손들이 그대로 받들어 평총을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않았다. 그뒤 많은 세월동안 병란과 시세 혼란으로 공의 묘소를 알 길이 없었다.
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 戊午)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 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 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1802년이전,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홍양호(1724~1802)>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봉분을 개축하고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멀리 상당산성 연봉이 이어지고 있다.
3. 영모재(永慕齋)
실전되었던 안렴사공의 묘소를 다시 찾게 되자, 공의 충절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공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1678년(戊午)에 공의 묘소 아래에 永慕齋(영모재)를 건립하고 講學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1708년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齋室로 이용해 왔고, 1988년 戊辰에 齋直舍와 함께 중수 개축하였다.
4. 송천서원(松泉書院)
실전된 묘소를 찾고 30년이 지나 1708년(숙종34, 戊子)에 유림들이, 명곡 최석정(1645~1715) 선생이 주무가 되어 청주서쪽 송천(현재의 청원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 *현재 빗돌만 남아 있다)에 서원을 세워 공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김사렴(金士廉)·최유경(崔有慶)·이정간(李貞幹)·박광우(朴光佑)·이지충(李之忠)·조강(趙綱)·이대건(李大建)>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였다.
그후 3년만인 1711년 辛卯년에 유생 이택하 등 120인이 詣闕上疏(예궐상소)하여 서원에 宣額(선액)할 것을 청하여 왕께서 該曹에 명하여 稟處(품처)하라 하였다. 그때 조정에 유사하여 일이 침체되었다.
1737년(영조13, 丁巳)에 호서 유생들이 공을 목은 이색을 모신 신항서원(청주 소재)에 같이 모시려다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1802년 이전,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홍양호(1724~1802)>
경종 3년(1723)에 이제신(李濟臣)을 추향하고 영조 때 최석정(崔錫鼎)·이인혁(李寅爀)을 추향하고 정조 22년(1798)에 이효석(李孝碩)·남구만(南九萬)·박문수(朴文秀)·이종성(李宗城)을 추향하며 원생 15인과 자모생 15인을 뽑았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6년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은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김여량(金汝亮)을 추향하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숭모사(崇慕祠)’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송천서원 배향인물>
①(안동)김사렴(金士廉) 1335-1405
②(전주)최유경(崔有慶)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김묘의 사위, 김묘의 세째딸이 최유경의 둘째부인, 따라서 김구용의 매부, 김사렴의 동생 김사안의 손아래 동서임
③(전의)이정간(李貞幹) 1360(공민왕 9)∼1439(세종 21) ☞안렴사공의 4자 김제의 따님 시부, 즉 사위 이사혜의 부
④(상주)박광우(朴光佑) 1495(연산군 1)∼1545(명종 즉위년).
⑤(우봉)이지충(李之忠) 1509(중종 4)∼1562(명종 17)
⑥(한양)조강(趙綱) 1527(중종 22)∼1599(선조32).
⑦(경주)이대건(李大建) 1550(명종 5)∼?1574 ☞김도(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사위, 이시발의 부
⑧(전의)이제신(李濟臣) 1536(중종 31)∼1584(선조 17)
⑨(경주)이인혁(李寅爀) 1634-1710 ☞이시발의 손자, 즉 김도(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외현손
⑩(전주)최석정(崔錫鼎) 1646(인조 24)∼1715(숙종 41). ☞최유경의 후손, 최명길의 손자,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안렴사공 김사렴)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서원터 : 송천마을 뒤에 있었다. 지금은 오창면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빗돌만 남아 있다.<청원군 지명지>
⑪(의령)남구만(南九萬) 1629(인조 7)∼1711(숙종 37). ☞남재의 후손, 남공철<1760(영조 36)∼1840(헌종 6)>의 선조, 남공철은 김상기(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외현손으로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안렴사공을 기록하고, 안렴사공(김사렴)의 묘갈록과 신도비명을 찬하였음
⑫(고령)박문수(朴文秀) 1691(숙종 17)∼1756(영조 32) ☞암행어사로 유명, 백곡 김득신과 절친했던 구당 박장원의 증손
⑬(경주)이종성(李宗成) 1692(숙종 18)∼1759(영조 35) ☞이항복의 5세손
⑭(전의)이효석(李孝碩) ?-1491 ☞안렴사공 4자 김제의 외손자, 즉 이사혜의 아들
⑮(개성)김여량(金汝亮) 1603(선조 36)∼1683(숙종 9).
5. 두문동 72현
소위 '두문동72현'으로 불리는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조선후기 영조대에 와서야 성리학이 최고로 발달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이때에야 비밀히 또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1740년 부조현비, 1751년 두문동비,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 1934년 개성에 두문동서원 창건 등이 이루어지고, 1774년 철감록→1872년 기우집→1923년 여조충렬록 간행, 1809년 두문동실기 간행, 1860년 화해사전→1924년 전고대방 간행, 1847,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5년 경현사지 간행 등이 이어진다.
안렴사공 기록은 기우집에는 휘자만 기록되고, 여조충렬록, 경현사지, 두문동서원지에는 거의 같은 내용의 여말의 행적이 실려 있으며, 화해사전에는 원천석이 주관하는 원주 치악산 단사 제사 기록과 운곡 원천석,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순은 신덕린, 아우 석루 김사안 등과의 대화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이러한 과정에
○ 1749년 충청도관찰사 홍계희가 안렴사공 墓碣銘을 찬하였다.
○ 1781년 묘하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 1802년이전 당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홍양호가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을 초하였다.
○ 1818년(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안렴사공의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 1822년 외후손되는 남공철이 고려명신전을 지을 때 일민편에 안렴사공 기록을 수록하였다. 이를 근거로 1925년 대동기문에도 실리었다.
○ ?1828년 13대손 김래가 청주에 사는 일가들의 부탁을 받고 오은선생 행장을 찬하였다.
○ 1830년 (순조30, 庚寅)년 7월 하순에 외손인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안렴사공의 13대손 김래의 부탁을 받고, 안렴사공 묘갈명을 찬하였다.
6. 안렴사공 신도비
1840년 이전에 안렴사공의 후손 人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가 碑銘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여 금릉 남공철(1760~1840)이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광복후인 1954년 묘하 입구에 안렴사공 20대손 창회 書幷篆(서병전)으로 신도비를 세웠으며, 다음해인 1955년 후손과 지역유림 다수가 참여하여 <오은공신도비운>을 간행하였다. 1977년 신도비각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신도비 명문대로 '이수귀부'로 고치고 비각전체를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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