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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25---진도에서 삼별초의 난 진압(1270∼12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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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6 21:59 조회1,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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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께서는 59∼62세때, 1270∼1273년 사이에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도와 제주도에서 이를 진압하시고, 63세때 1274년 고려군 도원수(총사령관)로서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대마도, 일기도를 거쳐 일본 북큐슈 하카타만에 상륙, 제1차 일본정벌을 다녀 오시었고, 70세때인 1281년에도 제2차 일본정벌을 다녀 오시는 등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셨습니다.

<삼별초의 난 진압> 이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자료는 연구논문등 시중에 발표된 자료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려사 김방경열전] 에 있는 기록만을 인용하여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충렬공께서는 삼별초의 난 진압중 1270년 (원종11, 59세) 홍친, 홍기의 무고로 (★2번째 무고)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되기도 합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 해 여름에 삼별초(三別抄-좌우 별초와 신의군의 통칭)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들을 강제로 몰아서 바다로 나가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왕이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추토사(追討使)로 삼았고 또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군사 60여 명을 인솔하고 몽고의 송(宋) 만호 등의 군대 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해중(海中)에 이르렀더니 반적들의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김방경은 이것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말리었으므로 반적들이 달아나 버렸다.

반적들 가운데서 도망쳐 온 남녀 노소 천여 명이 있었는데 송만호는 그들은 역적의 무리들이라 하여 모두 포로로 하여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 ▲행성(行省)에다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상당히 많았다.


반적이 ▲진도에 들어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고 여러 고을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나 ★신사전은 토벌에 뜻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반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 또 무슨 벼슬을 얻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 부사(副使) ★이빈(李彬)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전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 날에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는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공유는 환관들과 교제하고 결탁하였으므로 죄를 면하였던 것이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고 ▲진도를 건너다 보면서 진을 치게 되었는데, 반적들은 약탈해 간 선박들과 군함들에다 모두 괴상한 모양을 한 동물들을 그리었으며 그 배들이 강을 덮을 듯이 많고 그 그림자들은 물 위에 비치어 얼른거렸고 게다가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이 날아다니는 듯 빨라서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매양 싸울 때마다 반적들의 군사들이 먼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오곤 하여 호상간에 승부가 거듭되고 여러 날 서로 대치해 있게 되었다.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아해는 그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달로화적에게 공문을 띄웠더니 달로화적이 김방경에게 돌아오라고 하여 홍찬 등과 대질을 시켰고 참지정사 ★채정(蔡楨)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달로화적이 왕에게 말하기를 “홍찬 등이 말한 바는 허망한 일이니 이자들을 응당 감옥에 가두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방경을 석방하여 주었다.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아해는 겁을 내어 배에서 내려서 ▲나주에로 퇴각하여 주둔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여 닥치면 누구가 그 창 끝을 당해 낼 것인가?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 날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니 아해가 감히 퇴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들어가니, 반적들은 전함으로 역습을 해왔는데 원군(몽고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결승은 오늘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자기 진영 측으로 몰아 갔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 배가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니 적의 한 군졸이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다.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를 찔러 넘겼다.

김방경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들의 손에 죽겠느냐?”라고 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그것을 말리었다.

이때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어나 급히 싸웠으며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전함)을 타고 돌격해서 싸움이 조금 풀리게 되어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으나 아해가 말리었다.


이듬해에 왕이 안세정과 공유의 관직을 박탈하고 또 아해가 위축되어 비겁하게도 싸우지 아니 하였던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찬 등을 참형에 처할 것을 조서로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토의하고 진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부터 쳐들어가고,
영녕공(永寧公)의 아들 ★왕희(熙)와 ★왕옹(雍) 및 ★홍다구(洪茶丘)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부터 들어갔으며
대장군 ★고을마(高乙?)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쳐들어가니
군사들의 탄 배가 모두 백여 척이나 되었다.

적(賊)군은 ▲벽파정에 모여서 중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다구가 먼저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협공(挾攻)하니 적군은 놀라서 붕괴하게 되어 우군이 있는 데로 물러갔는데 우군은 또 그것을 두려워하여 중군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에 적군은 토벌군의 배 2척을 노획하여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보다 앞서 관군은 적군과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반적들이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관군이 용감히 공격하게 되자 반적들은 모두 처자들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하여 적들이 포로하였던 강도(江都-강화도)의 선비들과 여인들, 그리고 각종의 보물들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몽고 군대의 포로로 된 자가 많았다.

김방경은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그를 추격하여 남, 여 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획득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탐라로 달아났다. 김방경이 진도에 들어가서 쌀 4천 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왕경에로 운반해 가게 하였고,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다시 종사하게끔 하고 개선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 시랑 평장사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



▶▶▶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이주
〔이행검(李行儉)의 기사 첨부〕
이주는 자(字)가 호연(浩然)인데 금마군(金馬郡) 사람이었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부성(富城)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다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병마 녹사로 되었으며 직사관(直史館)으로 선발되었다가 일이 있어서 관직에서 떨어졌다.
상서(尙書) ★김창(金敞)이 그의 재능을 사랑하여 추천하고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되게 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들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되었다.
원종 때에 병부, 예부의 시랑(侍郞) 및 국자제주(祭酒)를 역임하였고 좌간의대부로 있다가 왕에게 글을 올려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상서 좌복야, 한림학사, 승지로 벼슬을 올려 주어 치사케 하였다.
그는 충렬왕 4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편지 기타의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생산(生産-이익이 나는 일)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는 쌀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그의 아들은 이행검(行儉)이다.
이행검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주(晋州) 사록(司錄)으로 배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상서 도사(尙書 都事) 겸 직사관(直史館)으로 조동되었다.
여기서 오래 근무하다가 지홍주사(知洪州事)로 파견되어 갔는데 삼별초의 반란 때에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그에게 관리의 선발, 임명 사업을 맡게 하였는데 ●김방경이 반적들을 격파하자 ★이행검이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 그 후 청주(淸州), 곡주(谷州-곡산), 풍주(豊州)의 세 고을에서 수령으로 있었는데 청렴하고 정치가 간결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충렬공의 진도에서의 삼별초의 난 진압과 관련하여 후손인 익원공파 金德龍(1518생∼1571대사헌∼?몰) 께서 지은 詩가 우리 가문의 최초의 족보인 1580년 경진보에 전하고 있습니다.

○ 題 珍島龍藏洞 (제진도용장동)-- 監司 駱谷公 德龍
遊 魂 海 島 敢 猖 狂 / 삼별초가 진도에서 미쳐 날뛰며
建 闕 營 城 太 陸 梁 / 대궐짓고 성쌓으며 너무 방자해
我 祖 當 年 曾 問 罪 / 충렬공 그때의 죄를 물으니
至 兮 人 指 古 龍 藏 / 오늘날 사람들이 옛 용장동을 가리키더라



▶▶▶진도에서의 삼별초의 난과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history/)에서 방영된 다음을 보면 대본과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1999. 08. 07 방영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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