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5---독립운동가의 후예 (괴산 소수면 수리)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7-28 17:58 조회1,659회 댓글0건

본문


독립운동가의 후예
(괴산 소수면 수리)

   이곳의 현 지명인 수리(壽里)는 일명 '숫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본래 '숯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었기에 '숯골'로 불리던 것이었는데 '숫골'로 와전되고 드디어 전혀 다른 뜻인 수리(壽里)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슻굽는 삶보다는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이 마을 입향조인 참판공(휘 紀)은 1587년(선조 20)에 父 참봉공(參奉公 휘 友甲)의 8子 중 3子로 태어났다. 1616년(광해 8. 30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참정사훈첨사(參靖社勳僉使)를 역임하고 1640년(인조 18)에 몰하셨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신 분으로 묘소는 마을 뒤 金鳳山에 있다. 그 아드님은 부호군공(휘 鼎臣)으로 1609년(광해1)에 태어나 1699년(숙종 25. 수 99)에 몰하시고 嘉善大夫 副護軍을 壽職으로 받으신 분이시다. 그 후 약 13대 가량을 이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이어온 일가들이었다.
    옛날 이곳에는 우리 안김이 총 100 여호 중에 90 여 호나 되어 마을 전체를 다 차지하고 살았는데 현재는 약 10 여 호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난 명인으로는 독립운동가요 한말 학자인 김용응 진사, 그 아드님인 독립운동가 태규님, 김태동 교통부장관, 김학응 충남지사. 현 홍성산업 대표이신 金泰震님, 전 군수였던 金泰秀님, 전 괴산군수였던 金瀚植님(참판공 휘 紀의 13대 종손) 등이 있으며, 같은 가까운 일가이나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철학박사이며 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지내신 김태길 박사 등이 있다.


1. 김약, 김기(金約·金紀) 형제
   約의 字는 士守, 紀의 字는 正叔이다. 공릉참봉 友甲의 손자이며 軍資監 判官 時亮의 子이다. 紀는 1616년(광해8) 무과에 급제하여 僉使가 되었으며 贈兵曹參判이 되었다. 約은 효행이 뛰어나 괴산 삼강록에 올라있으며 그 사실이 괴산 舊邑誌에 있다.
<참판공 문중(휘 紀 後孫) 가족묘원>
묘역 좌우의 석물들 (참판공의 원 묘역에 있던 것임)
참판공(휘 紀) 묘비, 부호군공(휘 鼎臣) 묘비


2. 김상익(金相翊) 1852∼1933
   괴산군 소수면 壽里에서 출생하였으며 高宗朝 義禁莩事를 역임하였다. 1910년 庚戌 국권침탈 때 亡國의 울분을 참지못하며 현직을 버리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는 抗日 義兵 養兵의 본거지였는데 공은 총책을 맡은 韓鳳洙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長男 世應, 次男 漢應, 三男 貞應, 四男 聲應, 五男 洛應 등 5형제와 함께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 무기 제작수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壽里에 추수해 놓은 수백석의 糧穀을 陸砧로 운반하여 軍糧으로 補給하였다.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는 왜병들로부터의 拉奪 등 갖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고 또한 수백석의 재산을 바치며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사남 성응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 유공자라 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부장에 취임한 바 있었으며 6.25동란 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3. 金相一(김상일) 1852∼1935
   자는 景明(경명), 호는 ()山(()산). 金鳳山人본(금봉산인), 본관은 안동으로 진사 김규년의 손자이다.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벼슬이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괴산군 용관읍 남쪽에 선정비가 세워졌고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도 송덕비가 세워졌다.(문헌 : 괴산군지)
   <사감정(四感亭)>
   소수면사무소에서 마주보이는 마을 뒤 구릉에 위치한다. 조선말(朝鮮末) 고종(高宗)때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장수의 6읍(邑)을 역재 선치(歷宰 善治)한 김상일(金相一)이 그 출생년월일시의 사주(四柱)가 고종황제와 동일한 인연으로 특별히 몽은(蒙恩)한 바 있음을 심감(深感)하여 1933년 김상신(金相愼), 김상현(金相賢)과 함께 건힙한 것으로서 사감정(四感亭)의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정내(亭內)에는 ‘사감정(四感亭)’, ‘영모재(永慕齋)’의 현판이 있고 건물구조는 단층 정방형(單層 正方形)의 목조와가(木造瓦家)로서 건평 4평의 건물이며 송판으로 마루가 놓여져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참고문헌】 충청북도, 1982, <<문화재지>>, 173.


4. 김용응(金鏞應) 1870∼1945
   槐山郡 沼壽面 壽里에서 出生하였고 章陵參奉을 지냈다. 1910년 庚戌 한일합방으로 국파군망하니 분연히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에서 군자금조달에 활약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8.15 광복후에 이승만박사가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환으로 취임치 못하였다. 후에 그의 孫이 중죄를 범하였으나, 祖父의 독립운동 공로로 인하여 이승만대통령의 특별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도 있다.
   <부자독립운동공적비>
   괴산 출신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용응, 김태규 선생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5. 김태규 (金泰珪) 1896∼미상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동단은 1919년 5월 조용주, 연병호, 이병철 등이 외교활동을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본부인 중앙부를 서울에 두고, 국내의 각처와 해외조직으로 상해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를 중심으로 외교부, 재무부, 편집부, 외교원, 외교특파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 활동과 관련된 외교원의 해와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의 발간등 선전물 간행이 주된 것으로서, 재무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그는 이같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그는 외교연구를 목적으로 상해에 파견되었으며, 한편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충청북도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다시 들어 왔다가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체포된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