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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9---청천 무릉동과 김사달 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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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9 00:01 조회1,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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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 무릉동과 김사달 묵적비
(괴산 청천면 무릉리, 도원리)


1. 청천 무릉동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3자 참의공 휘繼貞(계정)의 입향이후, 후손들은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武陵里(무릉리) 마을유래비 建竪(건수)>
   지난 1996년 9월 8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에서는 마을 유래비를 건수하였다. 여기 무릉리는 원래 무량이란 동명이었으나 동리 앞뜰에 무릉원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었으며 이 고장은 안렴사공의 6대손 군자감 휘公衍(공연)의 셋째아들 贈공조참의 휘繼貞(계정)의 묘소가 이곳에 모셔져 있고 이 묘소로 말미암아 아차실의 전설을 낳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지만 그중 우리 안동김문이 주축이 되고 있다. <대종회보 제55호, 1997. 1>

   大冶山(대야산) 主龍(주룡)이 힘차게 내려와 닿은 남향 福地(복지)에 한 폭의 洞天(동천)이 배판되었으니 청룡백호가 겹으로 둘러싸고 앞으로 博大川(박대천)이 호수되어 흘러들며 그 뒤로는 落影山(낙영산)이 안산되어 장엄하다.
   창송록죽과 기화요초가 어우러지고 산새소리 맑은 물소리 사계절을 노래하여 선경을 이루나니 옛분들은 이곳을 이름하여 武陵(무릉)이라 하였다. 이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중에 나오는 별천지 무릉도원과 방불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 무릉도원은 본시 한 마을이었기로 俗音(속음)으로 통털어 [무량]이라 불리웠으니 원도안 앞뜰에 무량들(武陵原)이란 표석이 세워진 것이나 가마소 강가에 세워졌던 枕流亭(침류정)을 일러 무릉에 소재한다고 한 浪城誌(낭성지) 기록을 보면 이를 분명히 뒷받침하게 된다.
   그후 청주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아차곡, 우동, 내·외산막을 망라하여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 선조 때에 贈공조참의 ★김계정의 묘소가 아차실의 전설을 낳고 入葬(입장)하면서 내외촌에 그 姓孫(성손)이 주축을 이루고 또 여러 성씨가 웅거하면서 인심이 순후하고 미풍양속을 지키어 오니 地靈(지령)을 힘입어 역대로 뛰어난 재질이 배출되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백과가 풍요롭게 결실되며 그 풍미가 또한 유난히 좋은 것이 특색인지라 이같은 민심과 기운이 영원히 발전하여 명실상부한 이상향이 건설되기를 굳게 다짐하고 염원한다.
   말미에 붙이거니 동구 밖 가마소(鍾潭)에는 명종때 충청감사 ★黃瑞(황서)가 침류정을 짓고 무릉도원의 절경을 謳歌(구가)하였는데 그후 우리나라의 위대한 학자요 시인인 栢谷 ★金得臣이 읊은 枕流亭10詠詩韻(침류정십영시운)인즉 무량의 10승경개를 노래한 절창인고로 각 절구의 제목만이라도 여기 기록해 남기고져 한다.
아차채미 종담조어 자봉영월 선암락하 화양방은
峨嵯採薇 鍾潭釣魚 子峰迎月 禪巖落霞 華陽訪隱
화동심춘 장림모우 열수조운 평교목마 단교귀승
花洞尋春 長林暮雨 列峀朝雲 平郊牧馬 斷橋歸僧
서기 1996년 9월 일 건비추진위원회 립


2. 김사달(金思達, 1928-1984)
   서봉 김사달 박사는 당대 우리나라의 才士로 가위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국민학교만 수학한 후 獨苦學으로 입신하여 여러 분야의 정상을 쟁취한 인간승리의 한 표본이다.
   그는 애석하게도 57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나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우리들 凡人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50평생으로 생을 마치지만 150년은 산 것만큼 일을 했다'고 했다. 이것은 결코 자만도 아니요 과장도 아니다.
   그는 초중등학교 교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의학박사, 전문의, 대학교수, 보건행정가, 문교정 책가, 국회 전문위원, 정치인, 저술가, 서화가, 문필가, 체육인, 도안사 겸 畵工, 필경사, 편집기술자, 심지어 태권도 명예 5단에 기합술과 최면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奇人스러운 경력과 행적의 주인공이다.
   그는 40여 권의 저서, 200여 편의 논문과 평론, 수백 편의 수필, 100여 개의 碑文과 懸板書, 수백 점의 서화 등을 남기고 체육상, 저작상, 수필문학상, 서예대상(국무총리상 및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특히 서예는 국전 심사위원까지 역임한 당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人間勝利譜는 실로 그의 처절한 인간투쟁을 통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한 없는 감동과 경외의 念을 자아내게 하며, 더없이 값진 교훈과 분발심을 안겨준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삶의 지혜이며 성공의 비결이다.
   이에 나는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인간투쟁의 역정과 빛나는 생애를 그려 후진들의 귀감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감히 무딘 붓을 들었다. 그러나 필자의 둔필로 과연 얼마만큼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독자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을는지 두려움이 앞선다. 오직 江湖諸賢의 질정과 성원을 기대할 따름이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애써주신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을 비롯한 관계인사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90년 5월 박형규 <서봉 김사달 박사 일대기, 영광은 햇빛처럼, 1990, 박형규 저, 범우사 간>

   묘소는 청천면 무릉리 입구 대로변 도원리 방축산에 있으며, 묘소 인근에 세워진 묵적비는 후면에 서봉의 후적벽부 필체를, 전면에 일중 김충현의 서로 서봉 김사달박사 묵적비를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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