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여름캠프 답사자료집 1-2---제2의 도산, 오창 목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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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9 00:41 조회1,418회 댓글0건본문
제2의 도산, 오창 목령산
(오창 일원 : 양청리, 주성리, 복현리, 양지리)
1. 오창 목령산
오창의 주산인 목령산 자락 구석구석에는 안렴사공 후손의 유택과 집성촌이 밀집해 있다. 안렴사공의 만년 은거지이고 유택이 모셔져 있는 모정리 도산에 이은 제2의 안렴사공파 姓地라 할 수 있다.
목령산 자락 여기저기에 안렴사공의 6자(간, 인비, 위, 제, 약, 식)중 휘 간, 휘 위, 휘 제의 묘소와 손자 휘 우주의 묘소가 있었는데, 1998년 복현리 우주의 묘소 위에 체경묘원을 조성하여 휘 간 묘소, 휘 약 영단, 휘 위 영단을 모시고 있다. 이곳 목령산 자락에 있는 휘 제의 묘소는 전의이씨에서 500년 이래 외손봉사하고 있다.
양청리, 주성리, 양지리 등지에 집성촌이 산재하고 있고, 양지리에는 송천서원과 휘 지 묘소와 휘 공예 묘역(공예--점--언희), 휘 공연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2. 복현리 체경묘원
1998년 예경묘원을 조성하여 以西爲上 원칙에 따라 향하여 좌측에 안찰사공의 면봉묘를, 중앙에 소윤공의 이안영분을, 우측에는 이제까지 실전되었든 정랑공의 초혼영분을 봉축하였다. 각 석물을 배열하고 안찰사공 구묘에서 가져온 문관석을 세웠으며 우측에 <체경묘원 유연비 (1998, 김재화 찬, 김재택 서)>를 세웠다.
1) 안찰사공(按察使公) 김간(金侃) ---무후
묘는 오창 목령 하사동 술좌에 여말선초의 묘의 형태인 웅대한 방형석묘로 모셔져 있었고, 1998년 체경묘원으로 면봉시 문관석 등 석물을 옮겨오고, 사각방형 묘의 석대는 옮겨와서 체경묘원 오르는 길 계단에 쌓아 놓았고, 고려동경으로 추정되는 부장품 유물이 발견되어 현재 영모재에 보관하고 있다.
2) 정랑공(正郞公) 김위(金 =삼수변韋) ---무후
휘 위(金 韋)공은 관이 정랑이며 배 실관부인과 함께 묘지가 (충북 청원 오창면)목령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끝내 실전하였기로 1998년 체경묘원에 영분을 봉축하였다.
3) 소윤공 김약(金 )
○고려말에 소윤 벼슬을 하였고, 부친 안렴사공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고를 평총한 연유로 역시 봉분을 못하게 유언하여, 목천 백락촌에 있는 묘소를 실전하였으므로, 1946년(병술) 12월 도산 오은공 묘하에 설단을 모시었고, 1998년 체경묘원에 설단을 이안하여 영분을 봉축하였다.
4) 지주사공 김우주(金遇周)
○?∼1444(세종26), 안렴사공의 손
○소윤공(김약)과 승평부인 순천박씨와의 사이에 1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仁德과 淸廉으로 알려져 本職에 거듭 임명되었는데 사퇴후에는 不營産業하고 자손에게 傳敎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충효와 정직을 世守할 것을 훈계하셨다.
○遇周(우주)는 임종하면서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미 평총을 하셨는데, 내가 어찌 홀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충절 가문의 넋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는 곧 충효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공의 가문을 절의대가로 칭송해 왔다. 아들 휘丸은 상대의 고향인 오근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땅으로 이거한 후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오창 복현리 분토골에 묘가 있고 묘하에 재실이 있으며, 1998년 공의 묘역 상단에 체경묘원을 조성하여, 김간 묘, 김약 영분, 김위 영분을 봉축하였다.
3. 도절제사공 김제(金 制) ---무후 ⇒ 전의이씨 외손봉사
○ 1377년(북원선광7 정사, 명홍무10, 우왕3) 3월 성균학생 김제가 진사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도절제에 이르렀다. 당시 父는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 士廉이었다. ○ 1382년(대명홍무15 임술, 북원천윤4, 우왕8) 5월 안동 김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동년급제한 안동 金明善은 벼슬이 서령에 이르렀다. <고문서집성23-거창초계정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창리)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長城(현 모정리)에 고려충신 안동김씨 안렴사공이 임종하시고 그 앞에는 山亭이 있었다. 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오근지>
○배위 성산군부인 성주이씨(父이원구)와의 사이에 2녀(이사혜, 이훈에 출가)를 두었다. 여서는 전의인 군수 李士惠(이사혜), 정랑 李訓(이훈)이니 군수공은 부 중추원사효정공貞幹(정간)이요 생4남하니 한성부좌윤孝碩(효석), 부사友碩(우석), 종사랑仁碩(인석), 부위義碩(의석)이며 효정공(이정간)과 좌윤공(이효석)은 송천서원에 동배되었다.
○묘는 오근목령에 있다. 당시 예속으로 도절제사공은 여서 이사혜 전의이씨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니 희세의 기문이오 미거라 찬양할 일이다.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4. 김지 묘소와 김공예 묘역
(청원 오창면 양지리 산수동)
1) 현령공 김지(1455-1534) 묘소
자 次軒차헌이며 공은 군수 성의 아우인데,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묘는 오근 양지리 산소동에 있는데 모재 ★김안국은 묘갈을 찬하여 이르기를 "너그럽고 후덕하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을 잘 보살폈으며 집안에 거처함에 화목을 돈독히 하였고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하였다. <오창지>
<김지 묘갈> 김안국 찬
2) 승지공 김공예(1455-1534) 묘역 (공예---점---언희 묘소)
감찰공(종손) 2자 현령공 휘土+遲는 문의현령으로 그 2자 승지공 휘公藝(공예)께서는 숙부 신창현감공 휘 (게)에게로 입양하였다. 김게(金 )는 현감 지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신창현감에 이르렀다. 묘 오근목령산이며 상하봉으로 묘갈(후손 참봉 秉默찬 묘갈 在哲서)이 있다.<오창지> 후손들이 목령 하사동, 오창 괴정리 입동, 오창 동성리 동성저수지 등지와 진천 상일송리, 이월 노은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김공예는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양사(사헌부와 사간원), 춘방(세자시강원), 전한, 직제학, 지제교를 역임하고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예조참의에 이르렀는데, 청백함으로 스스로 지켰다.
연달아 부모상을 만나 여묘를 살며 지나치게 훼손하여 상중에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함이 없고 오직 말씀하기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국가의 은혜를 받았는데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니,
이것이 마음 아프다" 하였다.
묘갈문을 동재 성세창이 짓고 동고 김로가 썼는데 그 명문에 이르기를
"후왕의 후손이요, 덕과 경사를 쌓았네.
정기 모여 우리 공을 낳아 문벌이 다시 혁혁하네" 하였다.
<金公藝 墓碣>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 (1485-1637)의 묘갈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산소동에 우참찬 成世昌(성세창)이 지은 비문을 홍문관 부수찬 金魯(김로)가 써서 세웠는데 1915에 다시 세웠다.<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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