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보는 안사연 여름캠프(17)-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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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07-29 17:39 조회1,614회 댓글0건본문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의 선조님 및 유적
1. 김 석(金 錫) 1495∼1534
字는 공하(公瑕), 本貫은 安東이다. 中宗朝 進士에 급제하고, 정암 趙光租의 門人으로 學文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根山郡 文光面 文法里 典法에 낙향하여 은거 하였다. 장남 金忠甲은 晋州牧使이며 金時敏의 아버지이고 4남 金悌甲은 原州牧使로 壬辰亂때 순절하였다. 墓는 槐山郡 槐山邑 陵村에 있고 四子 悌甲이 쓴 碑文이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곳을 능촌이라 명명하게 된 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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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충갑(金忠甲) 1515∼1575
字는 恕初, 號는 龜岩·悟竹山人, 木貫은 安東으로 進士 金錫의 아들이다. 1546年(明宗 1)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持坪, 獻納, 北平事를 거쳐 安岳郡守가 되었으며 妖僧普雨를 벌할 것을 누차 上疏한 바 있었으나 乙巳黨人으로 몰려 削職되고 서청주에 유배되었다가 宣祖初에 放還되었다. 墓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서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遷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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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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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집>
3.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진사(進士) 석(錫)의 아들. 이황 (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 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592년 임 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모리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관·의병(官義 兵)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 이어 아들 시백(詩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충민사 내와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에 제향(祭享),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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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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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충민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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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능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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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증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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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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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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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사액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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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친필 현액>
4. 김인갑(金仁甲) 1534∼1621
자는 善初, 進士 金錫의 다섯째 아들이며 毅齋 金悌甲의 아우이다. 1568년(宣祖1)에 進士를 거쳐 1578년(宣祖11) 長水道 察訪이 되었고 永山·庇安縣監을 역임 하였으며 左贊成에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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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5. 김시회(金時晦) 1542(중종 37)--1581(선조 14)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헌납 충갑(忠甲)이다.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예문관대교로서 홍섬(洪暹)·이이(李珥) 등과 함께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부평부사 등을 지냈다.1580년에는 한효순(韓孝純)·이항복(李恒福)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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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9)∼1592(선조25)
조선의 무신. 字는 면오(勉吾),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1578년(선조11) 무과(武 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고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 이해 10월 적의 대군 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 의 사상자를 내고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전투후 순찰시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후에 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晉州에 金時敏을 주향으로 하는 彰烈祠에 賜額이 내리고, 괴산군 능촌리의 충민사(忠愍祠)와 충남 천원군 병천면 백전의 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본래 중원군 살미면 무능리에 있었는데, 이곳이 충주댐 설치로 수몰 되자 1977년 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충민사 경내로 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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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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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영의정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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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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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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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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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비>(독립기념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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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교서>(2등에 녹선. 독립기념관 내)
7.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비안현감(庇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3사 (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랑(吏曹郞)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禮曹左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 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특히 평안도 관찰사로 발탁되었고,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641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으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 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 <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荷潭雜記>, <忠翼公文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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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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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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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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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문집>
8. 합천공. 휘 곡(穀) : 1599(선조32)--1661(현종2)
字는 돈적(敦謫), 음보로 올라 합천(陜川)군수를 지냄. 壽 63세이며 묘는 개향산(開香山-괴산읍 능촌리) 자좌(子坐)이다.
9. 김 번(金 繁)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 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에서 8년간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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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10. 김 휘(金 徽) 1607(선조40)∼1677(숙종3).
조선의 문신. 화가. 字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晩隱), 시양(時讓)의 아들. 1642년(인조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가 되었고, 1646년 민회빈(愍懷嬪)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자 그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즉위) 부수찬(副修撰)에 기용, 이조 정랑(吏曹正郞)·사간(司諫)·도승지 (都丞旨)·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1666년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1668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1) 이조판서를 지내 고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선영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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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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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서찰>
11. 김가행(金可行) 1654∼1731
字는 敬夫, 栢谷 金得臣의 孫子이며 金天揆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에 漣川縣監이 되어 청렴하게 善治하니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고 邑民이 生祠堂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楊致道의 亂때 宗廟署 令으로 從軍하여 楊武 1等勳에 錄選되었다. 그의 影幀은 괴산읍 능촌리 影幀閣에 奉安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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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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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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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제작연대와 화가는 미상. 2002. 5. 19. 항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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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부분 확대>
12. 취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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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선조께서 만년에 유유자적하며 글을 읽으시던 곳>
13. 제각
영상공 이하 직계손의 위패를 모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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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석(金 錫) 1495∼1534
字는 공하(公瑕), 本貫은 安東이다. 中宗朝 進士에 급제하고, 정암 趙光租의 門人으로 學文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根山郡 文光面 文法里 典法에 낙향하여 은거 하였다. 장남 金忠甲은 晋州牧使이며 金時敏의 아버지이고 4남 金悌甲은 原州牧使로 壬辰亂때 순절하였다. 墓는 槐山郡 槐山邑 陵村에 있고 四子 悌甲이 쓴 碑文이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곳을 능촌이라 명명하게 된 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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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충갑(金忠甲) 1515∼1575
字는 恕初, 號는 龜岩·悟竹山人, 木貫은 安東으로 進士 金錫의 아들이다. 1546年(明宗 1)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持坪, 獻納, 北平事를 거쳐 安岳郡守가 되었으며 妖僧普雨를 벌할 것을 누차 上疏한 바 있었으나 乙巳黨人으로 몰려 削職되고 서청주에 유배되었다가 宣祖初에 放還되었다. 墓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서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遷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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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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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집>
3.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의 문신. 의사(義士). 字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진사(進士) 석(錫)의 아들. 이황 (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 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6) 정언 (正言), 1581년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9년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592년 임 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모리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관·의병(官義 兵)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 이어 아들 시백(詩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충민사 내와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에 제향(祭享),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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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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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충민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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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능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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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증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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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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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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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사액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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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친필 현액>
4. 김인갑(金仁甲) 1534∼1621
자는 善初, 進士 金錫의 다섯째 아들이며 毅齋 金悌甲의 아우이다. 1568년(宣祖1)에 進士를 거쳐 1578년(宣祖11) 長水道 察訪이 되었고 永山·庇安縣監을 역임 하였으며 左贊成에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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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5. 김시회(金時晦) 1542(중종 37)--1581(선조 14)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헌납 충갑(忠甲)이다.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예문관대교로서 홍섬(洪暹)·이이(李珥) 등과 함께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부평부사 등을 지냈다.1580년에는 한효순(韓孝純)·이항복(李恒福)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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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9)∼1592(선조25)
조선의 무신. 字는 면오(勉吾),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1578년(선조11) 무과(武 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고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 이해 10월 적의 대군 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 의 사상자를 내고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전투후 순찰시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후에 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晉州에 金時敏을 주향으로 하는 彰烈祠에 賜額이 내리고, 괴산군 능촌리의 충민사(忠愍祠)와 충남 천원군 병천면 백전의 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본래 중원군 살미면 무능리에 있었는데, 이곳이 충주댐 설치로 수몰 되자 1977년 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충민사 경내로 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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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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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영의정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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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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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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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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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비>(독립기념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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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교서>(2등에 녹선. 독립기념관 내)
7.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비안현감(庇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3사 (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랑(吏曹郞)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禮曹左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 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특히 평안도 관찰사로 발탁되었고,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641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으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 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 <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荷潭雜記>, <忠翼公文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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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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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문집>
8. 합천공. 휘 곡(穀) : 1599(선조32)--1661(현종2)
字는 돈적(敦謫), 음보로 올라 합천(陜川)군수를 지냄. 壽 63세이며 묘는 개향산(開香山-괴산읍 능촌리) 자좌(子坐)이다.
9. 김 번(金 繁)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 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에서 8년간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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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10. 김 휘(金 徽) 1607(선조40)∼1677(숙종3).
조선의 문신. 화가. 字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晩隱), 시양(時讓)의 아들. 1642년(인조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가 되었고, 1646년 민회빈(愍懷嬪)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자 그 배후를 규명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즉위) 부수찬(副修撰)에 기용, 이조 정랑(吏曹正郞)·사간(司諫)·도승지 (都丞旨)·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 1666년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 당했다가 1668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1675년(숙종1) 이조판서를 지내 고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선영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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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서찰>
11. 김가행(金可行) 1654∼1731
字는 敬夫, 栢谷 金得臣의 孫子이며 金天揆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에 漣川縣監이 되어 청렴하게 善治하니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고 邑民이 生祠堂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楊致道의 亂때 宗廟署 令으로 從軍하여 楊武 1等勳에 錄選되었다. 그의 影幀은 괴산읍 능촌리 影幀閣에 奉安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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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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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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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제작연대와 화가는 미상. 2002. 5. 19. 항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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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부분 확대>
12. 취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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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선조께서 만년에 유유자적하며 글을 읽으시던 곳>
13. 제각
영상공 이하 직계손의 위패를 모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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