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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37---일본원정 출정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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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4 22:07 조회1,6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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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 宓庵(석 복암)이 지은 충렬공의 일본원정 출정길을 축수하는 疏(소) 한 가지가 <동문선>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釋 宓庵(석 복암)이라는 스님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 하였음.

충렬공께서는 (?1281년) 일본원정차 출정하시는 길에 고향 안동을 지나면서 어릴적 유상하시던 영호루에 올라 지은 詩 한 수가 또한 <동문선>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안동시내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映湖樓(영호루)는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는데, 충렬공께서 젊은 시절에 이곳에 올라 시와 풍월을 읊으며 유상하시던 곳이고, 충렬공께서 일본을 정벌하실 때 안동(복주)를 지나시다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은 바 있고,

훗날에 충렬공의 둘째아들 김흔(金 ) 장군과 충렬공의 현손 金九容이 영호루에 올라 충렬공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은 바도 있는 우리나라의(영남의)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현관(玄關 불문에 들어가는 관문)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화는 감동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옵고, 주벌(朱閥 궁궐)의 아래에 복을 비는 정성은 지극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물며 막측(莫測)한 땅을 정벌하려면, 미연의 우환을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현후(賢侯)께서는 성대에 태어나서,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두 왕대에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습니다. ♠중봉(中奉 중봉대부)과 ♠중찬(中贊)이 모두 높은 직위요, ♠상장(上將)과 ♠상상(上相)이 함께 귀한 자리입니다.

초변(貂弁)과 선관(蟬冠)은 덕망이 중하여서 백관들이 무릎걸음으로 공경을 표하고, 호부(虎符)와 귀인(龜印)은 위엄이 높아서 삼군(三軍)이 팔뚝을 떨면서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융거(戎車)를 몰아 왕궁 밖으로 나와서, 장차 훼복(卉服)(주D-001)들을 무찌르려고 1만 군사를 몰아 나감을 제갈공명이 촉(蜀)을 출발하는 듯하고, 1천 척의 배를 출동함은 왕준(王濬)(주D-002)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보다 승합니다. 이러한 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되면 얼마 안 가서 개선(凱旋)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묘한 공양을 장만하여, 특별한 법식을 차립니다.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처님의 원명한 거울에 맞으시기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한 돛이 바다를 잘 건너서 왜구(倭寇)들의 항복을 보게 되고, 일만 깃발이 무사히 돌아와서 순 임금 뜰에 첩서를 올리듯 하소서. 공명을 죽백(竹帛)(주D-003)에 길이 드리우고, 세월은 소나무와 참죽나무[椿]처럼 새로워지이다.

[주 D-001] 훼복(卉服) : 섬 오랑캐는 풀[卉]로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해서 일본(日本)을 훼복이라고 말한다.
[주 D-002] 왕준(王濬) : 중국 삼국시대 말기 진(晋) 나라 사람.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오 나라 서울을 함락시키고 오 나라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주 D-003] 죽백(竹帛) :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지 못하였던 때에는 모든 기록을 대[竹] 가지나 비단[帛] 폭에 썼었다. 그래서 역사를 죽백이라고 말한다.



■ 福州(今安東) 映湖樓 /안동 영호루를 지나며
---충렬공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 登福州映湖樓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 도첨의공 김흔 (충렬공 둘째아들)

十載前遊入夢淸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타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문온공 척약재 김구용 (충렬공 현손)

先祖題詩字字淸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여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이 누에 자주 소일하였고 환도후에 영호루 삼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편액하였다.
---생략---

139년후 갑술 7월 홍수로 다섯번째 유실되어 36년후 1970년에 시장 ★김낙현이 재직시 강 건너 남암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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