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45---전투방식의 優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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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29 조회1,481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전투방식의 優劣
기자는 12월1일 오후 이즈하라 읍내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향토자료관·崔益鉉기념비 등지를 답사했다. 음식점 「시마모토」에 들러 따끈한 청주를 반주로 삼아 저녁을 먹었다. 뜻밖에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이 다가와 첫잔을 채우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날 밤은 이즈하라여객선터미널과 멀지 않은 언덕 위의 한국인 경영의 호텔 「닛폰다야」(日本大亞)에서 묵었다. 朝食 포함 하루 숙박료 7000엔. 이날밤 닛폰다야 호텔의 투숙객은 필자 혼자인 듯했는데, 12월2일 朝食 때는 푸짐한 김치 한 사발까지 무료로 서비스했다.
12월2일 8시에 출항하는 이키시마(壹岐島)의 아시베(芦♥)港으로 가는 쾌속선 「비너스」에 승선(요금 4540엔)했다. 아시베港은 麗蒙연합군 함대가 규슈 공략을 앞두고 집결했던 곳이다. 쾌속으로 운항한 비너스는 바닷길 68km를 출항 1시간만에 주파, 오전 9시 정각 이키시마의 동쪽 항구 아시베港에 기항했다.
帆船시대의 이키시마라면 對馬島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거쳤던 「징검다리」이다. 麗蒙연합군 원정 때도 주요 공략목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의 260년 동안 12회에 걸쳐 訪日한 朝鮮通信使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아시베港에 상륙한 필자는 곧장 전화로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이키시마의 북쪽 항구인 가쓰모토(勝本)를 향해 달렸다.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景隆은 古來의 戰場儀式(전장의식)에 따라 휘하의 1騎에 명해 鳴鏑(명적: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古代의 開戰 의식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는 鍾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家系와 이름·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뛰어나오는 이 日本 무사를 에워싸고 개 패듯 때려 죽여버렸다.
「이건 無法 아닌가」라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400여 명의 몽골군은 短弓에 毒화살을 매겨 난사하고 창을 휘두르며 육박해 갔다. 이키軍도 응전,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창과 毒화살로 상처를 입은 일본군의 피해는 컸다. 景隆은 부하의 거의 80%를 잃었다.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騎에 불과했다. 그는 히츠메城에 들어가 하룻밤을 밝혔다. 당시의 히츠메城은 急造(급조)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에 大軍의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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