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46---壹岐島를 결딴낸 몽골군의 잔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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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30 조회1,803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壹岐島를 결딴낸 몽골군의 잔학상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景隆은 부하를 독려하여 분전하다 최후의 순간, 郎黨인 宗三郞을 불러 大宰府에 급함을 고하도록 명하고 할복자결했다. 宗三郞은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세도우라의 船匿城(후나가쿠시)로 달려가 敗戰을 먼저 고한 후 하카타港을 향해 쪽배를 저어갔다. 船匿城에서는 城主인 景隆의 妻가 아이들을 먼저 찌르고 난 다음에 그녀 역시 老母와 함께 자결했다.
가쓰모토로 가는 도중에 들른 히츠메城 유적에는 新城神社가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元寇(원구)기념비」 및 平景隆의 묘가 있다. 일본인들은 麗蒙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元寇」라고 부른다. 城跡(성적)으로부터 50m 떨어진 동쪽에 히츠메橋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千人塚(천인총)이 있다. 지금은 「文永의 役 新城古戰場」이라고 하는 큰 충혼탑이 천인총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 정벌(1274)을 「文永의 役」(분에이노에키)이라고 한다. 7년 후의 제2차 정벌(1281)은 「弘安의 役」(코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이키島엔 「弘安의 役」 관련 현장도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 호에 쓸 것이다.
이키島에는 「元寇」와 관련한 무덤이 숱하게 산재하고 있어 당시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文永의 役 古戰場」에 관한 「勝本町通史」의 기록이다.
『이키에 상륙한 몽골군은 섬사람들을 보는 대로 죽였다. 남녀와 아이의 구별없이 극도로 잔인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살육은 곳곳에서 확대되었다. 예컨대 乳兒(유아)의 가랭이를 찢는다든지, 남자를 붙잡으면 귀·코를 자른다든지 했다. 또 여성을 잡아 한데 모아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서 끌고 다니고, 드디어는 軍船의 뱃전에 매달아 익사시켰다』
이러한 잔학행위를 되풀이한 몽골軍의 통과 후에는 섬사람들의 시체가 겹쳐 쌓였는데, 이것을 매장했던 것이 千人塚이다. 新城 천인총 이외에 浦海·本宮·立石·射場原 등지에도 유사한 무덤들이 현존한다고 한다.
당시 이키島 사람들의 다수는 산으로 도피했지만, 對馬島와는 달리 숲이 깊지 않아서 곧 발견되었다. 「산으로 도망쳤어도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의해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는 傳承(전승)도 있다.
이 때문에 「무고이」(잔혹하다)라는 일본말은 이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傳承을 이키島 등 도서·연안지역에 남기고 있다. 떼를 쓰며 우는 아이에 대해 『무쿠리, 고쿠리가 왔다』고 겁을 주어 달랜다고 한다.
몽골군은 野戰 능력에 있어 世界戰史上 冠絶(관절)했지만, 그 잔혹함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었다. 원래, 그들은 落城(낙성) 때까지 항전한 城民들에 대해선 入城 후에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몽골군의 西征史를 보면 이런 몽골군의 흉폭함에 관한 소문이 一波萬波(일파만파)로 번져 싸워보지도 않고 開城해 버리는 城市가 적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위력적인 心理戰(심리전)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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