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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47---시카노시마(志賀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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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34 조회1,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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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상호 親緣性 깊은 韓民族·몽골족·倭人

그러나 이키島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 것만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 측의 기록 「心中大義」에 『倭人(왜인), 이리(狼)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일본인의 용맹성에 대한 驚異(경이)로움이 아니었겠는가.

그야 어떻든 韓·蒙·日의 3국은 모두 알타이系 언어를 구사하는 등 민족간 親緣性(친연성) 차원에서 보면 서로 「4촌쯤」 된다. 이 세 나라 사람의 조상은 원래 알타이산맥 일대 스텝(草原)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족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몽골인은 동쪽으로 조금 이동했고, 한국인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왔고, 일본인의 主流는 한반도에서 다시 일본열도로 건너갔던 先祖의 후예인 것이다.

이런 세 나라 사람의 DNA 속에는 好戰性(호전성)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몽골인은 워낙 騎射(기사)에 뛰어난 데다가 野戰性이 강했고, 일본인도 칼싸움과 용맹성에 관한 한 세계 제1의 자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던 민족이었다. 대륙과 陸接(육접)해 있어 끊임없는 異民族의 침략을 받아왔으면서 民族의 正體性(정체성)을 지켜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한국인의 끈질김도 他의 追從(추종)을 不許한다.

이런 상념에 젖어 있던 중 불현듯 이번 답사에 앞서 잠시 통화한 江原大 사학과 周采赫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 무슨 절엔가 보존된 사료에는 「몽골이 침략해 왔다」고 하지 않고 「무쿠리가 왔다」고 쓰여 있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Mogol」의 原音이 貊高麗(맥고려)·貊槁離(맥고리)일 수 있습니다. 「Mogol」을 아프가니스탄에선 「모골」, 印度에서는 「무갈」이라 했고, 시베리아 쿠르테킨의 돌궐碑文(비문)에는 「Bo¨kli」(뵈크리)라고 했는데, Bo¨kli는 학자들의 논문에서는 대체로 貊高麗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가쓰모토港에 들러 우선 관광안내소를 방문했다. 관광안내소의 56세 여성 계장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珍客(진객)으로 대접했다. 기자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받은 그녀는 『대답을 못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해 줄 「元寇」 전문가가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 마을의 교육위원까지 불러왔지만 갈길이 바빠 곧 일어섰다.

기자는 다시 아소베港으로 되돌아가 오전 11시15분에 출항하는 하카타行 페리호에 맨 꼴찌 승객으로 승선했다. 출항 2시간30분 만에 하카타港에 상륙한 기자는 다시 인근 뱃머리로 옮겨 오후 3시 시카노시마(志賀島)行 연락선을 탔다. 시카노시마는 하카타港을 바깥바다(玄界灘)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는 섬이다.

출항 30분 만에 연락선은 시카노시마 부두에 닿았다. 이 뱃머리에서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2.4km를 西進하면 조그마한 구릉 하나가 나온다. 이곳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전쟁 때 쟁탈의 요지였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구릉 위에 오르니 하카타港의 모습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절묘한 관측고지다.

이곳에는 몽골군의 寃魂(원혼)을 위로하는 供養塔(공양탑)이 後世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립되어 있다. 이 공양탑은 1274년의 제1차 정벌 때 大폭풍우로 인해 본대와 떨어져 이 섬에 표착했다가 일본군의 토벌로 섬멸당한 몽골兵 220명의 유해를 묻은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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