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56---颱風―운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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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41 조회1,595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颱風―운명의 날
東路軍과 江南軍이 합류함으로써 戰列을 再정비한 연합군은 하카타灣을 향해 진격하려 했던 직전에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7월30일 밤부터 강력한 西北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颱風(태풍)이었다.
날이 바뀌어 閏 7월1일, 현행 양력으로는 8월23일이었다. 연합군 장병들은 크게 요동치는 함내에서 배멀미로 곤죽이 되었다. 태풍은 점점 거세어져 집채만 한 파도가 함대를 습격했다. 西北風이었기 때문에 鷹島 남단과 松浦 사이의 伊萬里灣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함대는 정면으로 강풍을 받았다.
연합군의 함대는 거친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서로 충돌하거나 육지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鷹島 주민들이 목격한 것은 해안에 떠밀려 온 숱한 선박의 잔해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사체들이었다.
일본 측 기록인 「八幡愚童記」에는 「7월30일 夜半부터 乾風(건풍)이 크게 불었다. 閏 7월1일, 敵船이 모두 飄蕩(표탕: 정처없이 떠돌아다님)해서 바다에 가라앉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乾風은 西北風을 말한다.
연합군 함대는 東路軍 900척과 江南軍 3500척, 합계 4400척. 서북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 응도 남단의 바다로 피난을 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응도 남단 해역뿐만 아니라 응도의 북쪽 해역, 黑島 및 伊萬里灣 안쪽과 灣內의 御廚沖 방면의 해역과 玄界灘 등지에도 散開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풍의 계절이었던 만큼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海國 일본을 공략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태풍으로 큰 타격을 받은 연합군 중 일부는 간신히 鷹島의 船唐津으로부터 床浪·殿浦(토노노우라)에 이르는 南海岸에 漂着, 거기서 伐木하여 新造한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鷹島에는 태풍의 피해를 받은 다수의 몽골군 장병이 도주해왔는데, 일본軍이 그들을 초토하기 위해 龍面庵이라는 곳에 진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少貳景資로서 이 구릉지에 「御館」이라고 쓰인 標石이 남아 있다. 鷹島의 船唐津과 中川原은 일본군과 몽골군이 격렬하게 교전했던 곳으로서, 승리한 일본군은 몽골의 패잔병을 다수 참수하여 현재도 「首除(쿠비노키)」라고 하는 地名이 남아 있다. 그 전적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元寇史蹟 中川激戰地―前方 일대를 船原·中川原이라 칭하고, 이곳을 首除(쿠비노키)라고 부른다. 1281년 여름 弘安 4년의 役에 상륙했던 元軍을 迎擊 潰滅시켰던 최대의 격전지라고 한다. 首除는 적의 목을 겹쳐 쌓은 곳이고, 동쪽의 中川은 血刀(혈도)를 씻었던 곳으로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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