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57---14만 명 중 3만 명만 歸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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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5:42 조회1,649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14만 명 중 3만 명만 歸還
일본 측 사료인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는 태풍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鷹島에 표착한 異賊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골·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것을 본 鎭西軍이 少貳景資의 지휘로 수백 척이 鷹島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한 異國人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中河 하구에서 목을 쳤다>
위에 나오는 「中河(나카가와)」는 지금도 鷹島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작은 하천에 지나지 않지만, 이른바 「蒙古襲來遺蹟」으로서는 빠트릴 수 없는 현장이다. 궁지에 몰린 패잔병들도 최후의 항전을 감행, 日本 軍兵들도 다수 전사했다고 한다.
鷹島로부터 배후의 이마리灣 연안 지역 또는 灣內 御廚沖 방면에 산개해 있던 연합군 함대도 태풍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뉴스가 전해지면 하카타灣 방면에 포진했던 鎭西軍도 잔적토벌에 나섰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초토전은 閏 7월7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아타하이〈·洪茶丘·★金方慶·范文虎 등 사령관들은 간신히 침몰하지 않은 군선들을 타고 고려로 돌아갔다. 「元史」 범문호 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원수 范文虎는 平戶島 근해에서 그의 배가 침몰했는데 표류한 지 1晝夜에 이르렀다. 다행히 破船의 船板에 매달려서 목숨을 건져 잔존했던 堅船을 골라 거기에 옮겨 탔고, 휘하의 사졸 10여 만인을 五龍山 밑에 버리고 귀국했다>
范文虎의 부하 사졸들의 행방에 대해 「元史」 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범문호가 도주한 후 잔존 士卒들은 張百戶를 主帥(주수)로서 張總管이라 부르고, 벌목하여 배를 新造, 그것을 타고 귀환하려고 기도했지만, 7일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모두 敗死하고 잔존 2만~3만 명은 포로로 연행되었다. 9일에 八角島에서 몽골인, 고려인, 漢人은 모두 살해되고, 新附의 唐人(南宋人)은 노예로 되었다. 그러나 노예로 된 于진·莫靑·吳萬五의 3인은 도망, 겨우 본국으로 돌아왔다>
승전한 일본군이 몽골인·고려인·漢人 포로들은 모두 참수하고 南宋 출신 포로들만 노예로 삼았다는 대목도 주목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南宋 출신 포로들을 일본 東北지방의 新田개발사업 등에 동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력 손실에 대해 「元史」의 아타하이 傳에 「師(사: 장병)를 잃은 것, 10 중 7, 8人」, 同書 「世祖本紀」에 「10 중 1, 2만 남았다」고 했고, 「東國通鑑(동국통감)」에는 「몽골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무려 10만, 고려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또한 7000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원정군의 총병력 14만 명 중 귀환자는 겨우 3만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물의 보전 처리
현재, 鷹島의 남해안 床浪에서는 水中考古學에 의한 해저유적조사가 시행되어 인양된 다수의 침몰선박 및 해저유물이 鷹島町 新崎免의 町立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鷹島 해저유물은 床浪지구뿐만 아니라고 남해안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鷹島의 南岸 床浪(토코나미)灣은 연합군 함대의 피해가 가장 컸던 장소였다. 이 해역의 실크層(두께 3m)의 모래층을 흡입기로 빨아 올리면, 아직도 700여 년 전의 遺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鷹島의 역사민속자료관에는 鷹島 해역에서 인양된 생활용품과 船具·무기가 다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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