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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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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09 16:03 조회1,6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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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스페셜 (KBS1TV)
●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방송일: 1999. 08. 07)  

일본의 동경대학교.
이곳에 고려와 관련된 13세기의
고문서 한 장이 있다.
문서의 명칭은'고려첩장불심조조'
고려첩장은 고려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불심조조는 이해가
안되는 조항들을 말한다.
즉 고려문서를 접수한
일본 관리가 의문점을 적어놓은
것이다.

"몽고병이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정으로 모여라!"

1270년 6월 1일,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삼별초가 집결했던 구정은
운동장을 뜻한다.
그 터로 추정되는 곳엔 현재
심도직물이 들어서 있다.

정부를 구성한 삼별초는 이틀 뒤
강화를 떠났다. 출발지점으로
알려진 외포리엔 삼별초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그들은 서해를 항해하며 남쪽으로
내려왔고, 마침내 항해 74일만인 8월 19일, 목포 앞바다에
위치한 섬인 진도에 닻을 내리게 됩니다.

이곳이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이 대첩을 거뒀던
그 유명한 명량해협입니다.

그리고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삼별초는 이곳을 차단해
개경에 경제적인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진도는 섬이라고 하기엔 비옥한 농지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옛부터 한해 농사로 삼년을 먹고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용장산성 진도 북동쪽에 있는 벽파진,
이곳으로 들어온 삼별초는
그 가까이에 도성 자리를
정하고, 성을 쌓았다. 이것이
용장산성이다. 용장산성은 지난
84년에 지표조사가 이뤄져,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그 주위론 아직도 옛날 사용했던
성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성곽의 일부는 토성이지만,
대부분은 이렇듯 석성이다.
둘레는 13키로미터 정도,
고려의 도성이었던 개경엔 조금
못미치지만, 강화보다는 훨씬 큰
규모다. 이것을 삼별초는
단 9개월만에 완성해냈다.

성곽 둘레로 계산해보면,
성내 면적은 258만평에 달한다.
이런 대규모 역시 몽고와의
장기전을 대비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궁궐터는 성내 북동쪽, 산과
계곡에 둘러싸인 곳에 있다.
산비탈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조성했는데, 모두 아홉 단이다.
각각의 기단은 석축으로 만들어,
비탈진 지형을 보강했다.
그리고 석축 바로 위에 건물이
있었던 듯, 초석이 발견되고 있다.
조사 결과, 궁궐터의 면적은
7천여평, 건물은 17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궁궐과 관아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중 왕이
머물렀던 정전터는 맨 윗쪽에
있는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는 89년에 이뤄졌는데,
그때 다량의 기와와 청자들이
수집됐다. 이들 유물은 삼별초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일본 동경대 사료편찬소에서
'고려첩장 불심조조'가 발견된건
1977년, 이 문서에서 삼별초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일본에
알렸다. 나아가 표류한 일본인을
돌려보내고 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

1단계는 전라도 공략이었다.
나주와 전주, 장흥 등지를
차례로 공격했고, 마침내 전라도
연해는 삼별초의 세력권이 됐다.
이로써 진도의 입지는 보다
강화됐다.

2단계는 제주도 공략이었다.
당시 고려 관군이 있던 제주에
상륙해 관군을 패퇴시키고,
후방기지로써 제주를 확보했다.

이후 경상도에 진출하는데,
그 거점은 남해였다.
11" 남해 섬 PAN (쉬고-2초)
기록에 따르면 삼별초의 유존혁
장군이 남해에 주둔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둔지는 어디였을까?

이곳 망운산엔 장군터로 부르는
곳이 있다. 수풀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군데군데 석축을 확인할
수 있다. 돌의 크기나 석축의
높이로 봐서, 꽤나 큰 건물지였을
것이다. 남해엔 옛부터 이곳
장군터와 유존혁에 대한 말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남해를 거점으로 해서, 삼별초는
경상도를 공격했다. 주로 몽고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였던
마산과 김해, 동래로 진출했다.
몽고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남해 연안엔 당시 삼별초의
세력권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특히 강진의 관찰봉에
그 흔적이 뚜렷한데,
연해장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삼별초 진도 해안가에 있는 굴포리,
이곳 어귀엔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의 사당이 있다.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당제를 지내는데,
삼별초에 대한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민심은
그 옛날 더욱 각별했었다.

1271년 5월 15일, 진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여몽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병선 4백여척에 군사는 만명이
넘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배중손은 남도진으로 향했고,
김통정은 왕을 호휘하며
금갑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왕은 죽음을 맞았고,
김통정은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떠났다. 남도진으로
후퇴했던 배중손 부대는 결국
전멸했다. 이렇게 삼별초의 진도
정부는 패망하고 말았다.

진도엔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곳 논수골은 승화후 왕온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다.

목숨을 논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 논수골. 여기에서
왕온은 끝내 죽음을 맞았다...
이 마을 뒷산에 왕온의 무덤이
있다.

언제 누가 시신을 수습해
묻었는지는 모르지만, 옛부터
이곳은 왕온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시대 석인상이 삼별초정부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왕온의 묘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떼무덤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들판은 온통 무덤으로
덮혔다고 한다. 그 한켠엔
여인네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여기급창둠벙이 있다.

삼별초 항몽순의비가 세워져있는
이곳 항파두리성은 삼별초가
쌓은 성이다.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오자마자
우선 방비를 튼튼히 했다.
항파두리 내성은 석성으로
견고하게 쌓았는데, 둘레는
7백미터 정도다. 그 바깥으로
다시 6키로미터에 달하는 외성도
구축했다.

제주도 바닷가에선 특이한
돌담이 발견되기도 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밝혀졌다. 이런 성곽은 제주의
해안 곳곳에 있는데,
이것을 환해장성이라고 한다.

특히 마산과 거제에선 몽고의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삼별초는 이런 전함을 여러척
불태워버렸고, 몽고의 계획엔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자 개경 정부와 몽고는
마침내 제주를 공격했다.
여몽연합군은 병력을 나눠,
북쪽 해안인 명월포와 함덕포로
진격해 왔다. 협공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온지 삼년만인 1274년
4월 28일의 일이었다.

당시 연합군의 병력은 수륙군
만2천명에 병선이 160척이었다.

김통정은 남은 군사와 함께
탈출, 한라산 자락에 있는
붉은 오름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추격으로 이곳에서
최후의 접전을 벌였고, 김통정은
자결했다...

이 '고려첩장 불심조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별초는
일본에 원병을 보내달라는 외교문서를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일본은 삼별초의
존재조차 몰랐고, 삼별초가 스러져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고려의 이름으로 보내온 한 장의 외교문서에 대해서
이상하다고만 여기고, 이런 기록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삼별초는 몽고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됐었습니다.
삼별초의 4년간에 걸친 대몽항쟁으로 인해서 몽고는
일본 원정을 늦춰야 했고, 일본은 그만큼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삼별초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주역이었던
셈입니다.





■ 역사스페셜 (KBS1TV)
●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방송일: 1999. 03. 20)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유물의 복사본이 있다.
'몽골습래회사'.바로 여기에 고려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한 일본인 무사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고려 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 1차 원정이 있었던 때는 1274년 10월.
9백척의 전함과 2만 8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여몽연합군은 큐슈 하카다 항구에 상륙한다.

이곳에서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몽고군에서 강력한 무기와 전투력의 우세로
연합군은 일본 무사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다.

무사들의 처참한 패배로 일본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린다.

단 하루만의 공격으로 대승을 거둔 연합군은 다음날 철수하는데,
제1차 원정은 일종의 무 력시위였던 것이다.그러나 이 전쟁은 일본
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이듬해, 일본은 고려 몽고 연합군이 다시 침 략해 올 것에 대비하여
돌로 방루를 쌓는다.그 래서 그 이름도 몽고방루다.

현재는 방루의 일부만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당시 이 방루의 길이는 2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고 한다.
이 그림에서도 그 몽고방루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3만 5천명을 동원하여 불과 4개월만에
9백척의 전선을 만들었다.대선 3백척,중형선 3백척,보급선 3백척이다.
그때 군함을 만든 곳은 지금의 변산반도로
기록되어 있다.이 해안의 어디쯤일까?
전북 부안군 구진마을. 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 에서 조선소가 있었다는 흔적이 발견 되었다.
이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통나무가 하나 버려 져 있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뻘을 개간하기 위해 흙을
파냈더니 그 속에서 이런 통나무가 셀수도 없 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처음 발견됐을 때 나무의 크기도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드리 같은데 썩은 부분을 벗겨내고도 이것 보다 훨씬 컸다.(이런게 몇 개나 나왔죠?)수도 없이 나왔다.썩은 것도 있고 ..
도대체 이 통나무는 어디에 사용됐던 것일까?
통나무들이 발견된 바로 그 뻘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배는 이렇게 통나무받침대 위에서 만들어졌다.배가 완성되면 굴리듯이 밀어서 바다로 운반했던 것이다.
이렇게 배를 받치고 있는 통나무들을 바탕이라고 한다.
바탕이 발견된 것은 이곳에 조선소가 있다는 증거였다. 바로 이곳이었을까?
노인들 얘기로는 여기가 (수군)진터라서
이런게 있다 한다.
최근까지도 곰소에서 배를 만들었다.
옛날 그 전통적인 배는 여기서 다 만들었다고
조선소가 있었던 자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나무들 16 6.25 이후 심은 것들이라 수령이 4-50년 밖에
안됐는데도 제법 아름드리였다.무엇보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줄기는 배를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였다.
이규보가 서른두살 때 여기 벌목 책임자로 왔 었는데 변산의 나무가 어떻게 좋던지 나라의 창고나 다름 없었다 그런 기록이 나오고
그러다면 이곳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조선 소 자리가 분명했다.아마도 고려인들은 이 곳에서 군함을 만들며 일본 원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1281년 제 2차 원정에서도 고려에서 만든 900척의 배가 동원된다.
그런데 이 원정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 어난다. 여몽연합군이 대참패를 당한 것이다.
몽골습래의 그림에도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당시 여몽연합군을 물리친 주역은 일본 군이 아니라 신의바람이라 불리는 카미카제였 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원사의 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원나라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어졌으나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
신의 바람 ,카미가제에도 끄덕 없었다는 고려의 배,고려의 군함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러나 고려인들이 3-4개월만에 900척의 크고 작은 배를 만들었고, 그 배가 카미카제에도 부서지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서가 생기고 그렇다면 고려인들은 짧은 시간안에 무척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긴데요.
고려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원정에 앞서 배를 만드는 책임자였던
★김방경이란 사람이 한 말입니다.
옆에 글씨 생긴다.
"중국식으로 만들면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먼저 전라도에서 우리식으로 배를 만들겠다"





■ 역사스페셜 (KBS1TV)
● 고려 몽고 연합함대 일본원정,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방송일: 2002. 02. 09)

지금도 해마다 일본 나가사키와 큐슈 앞바다에서는
7백년전 유물들이 건져지고 있다.
깊숙한 바다속에서 잠자고 있던 오래된 유물들
유물표면의 조개껍데기들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칼과 갑옷들도 함께 나오고 있다.
갑옷 이 유물들은 일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거대한 규모의 닻이다.
길이가 무려 7미터나 된다.
거대한 닻을 사용했던 7년전의 배
복원되는 배 그것은 바로 고려몽고 연합군의 일본 상륙작전에 사용되었던
배 전함이었던 것이다.

저 바닷속 아래 침몰선이 보이십니까
일본 큐슈의 이마즈만 해역에서 발견된 것인데요
고려 몽고 연합 함대가 일본 원정을 할때 썼던 전투선의 잔해입니다.
자세히 한번 살펴 볼까요
배는 너무 많이 부식돼서 형태를 거의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 배위에 실려 있던 유물이 보입니다
자기 그릇과 항아리들,. 관인 같은 도장도 보이구요
배 가장자리에 큰 돌 두 개가 놓여 있는데요,
이것은 닻에 매달았던 돌입니다. 자그마치 2미터 50센티미터.
이런 돌 두 개를 돌닻으로 썼던 것을 보면 배가 상당히 컸을 겁니다

쿠마모토현 타케자키 마을.
이절에는 희귀한 사료가 전해지고 있다
7백년전의 전쟁을 전하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몽고 습래 회사, 바로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 것이다.
몽고습래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7백년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일본무사
스에나가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스에나가는 실존인물이다
절의 뒤쪽에는 실제로 그의 무덤이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스에나가는 전쟁에서
자신이 싸운 모습을 화가에게 전달해 그리게 했다
이 장면은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일본군을 묘사했다
해안가에 방루를 쌓아 놓았다
그림속 방루는 7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해안가에 쌓은 석축.
이것이 바로 그림 속 방루다
높이는 3미터 정도다.
방루는 1차 전쟁후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쌓았다
"이 두루마리 그림에는 1281년의 두 번째 침략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곳 이키노 마츠바라 지방입니다
이렇게 돌로 쌓고 저위에서 경비를 섰습니다"
방루는 그뿐이 아니었다
후쿠오카 시내의 한 대학.
학교안에 방루가 있다. 학교건물을 신축할 때
발견된 방루를 그대로 보관한 것이다.
당시 이 지역은 해안의 모래사장이었다
이곳 역시 방루의 높이는 3미터에 이른다.
크고 작은 돌을 반듯하게 쌓아 올렸다
"1274년에 상륙(1차 전쟁)을 한 2년뒤인 1276년에
쌓게 되는데 가마쿠라 막부가 큐슈의 무사들에게
명해 큐슈 각지에서 농민들을 데려와 공사를
합니다"
지금도 하카다만 연안 곳곳에는 방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은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관문인
하카다 연안 일대에 방루를 쌓는다.
해안에 쌓아진 방루의 길이만도 20킬로미터에
이른다

1274년 10월20일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일본 무사들의 처참한 패배로
방어선이 무너진다
그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린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큐슈의 이키섬.
이곳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 있다
원구 천인총이다
당시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과 연합군이
함께 묻혀 있다
7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키섬에는
당시 전쟁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지역 토산품 가게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목제품이 있다. 귀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현지인들은 무쿠리 고쿠리라고 부른다.
무쿠리 고쿠리 무슨 뜻일까?
"이는 두 번에 걸친 몽고 침략,몽고군과 고려군의
침략으로 남자는 모두 살해돼 전멸했기 때문에
그 공포감과 처참함 잔학함을 나타내는 말로
예전부터 우는 아이를 달래때 사투리로 무쿠리
고쿠리 온다는 식으로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로
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코자키궁은 당시 전쟁을 기리는 신사다
이곳 유물 창고에는 일본 원정때 연합군이 사용한
활이 보관돼 있다
연합군측의 장군이 썼던 활이라고 한다
활의 크기는 1m20cm미터 남짓, 전형적인
우리 활의 모양이다.
재질은 뽕나무와 대나무로 되어있고 나무로 된
몸체는 가운데가 쇠로 연결돼있다.
활의 양끝은 고래뼈를 붙였다

1274년, 일본 본토인 하카다 연안에 고려 몽고
연합군이 속속 상륙한다
본격적인 진격을 앞두고 고려 몽고 연합군은
이곳에 진을 친다. 몽고습래회사 그림의
이 장소는 소하라 라는 곳이다
해안가 바로 위.
고려 몽고 연합군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야산에 진을 쳤다
"저쪽에서 몽고와 고려군이 상륙합니다 그리고
이 소하라 산이라는 낮은 산에 진을 친다 이 진을
친곳이 에마키에 이렇게 그려져 있는 곳이다"
큐슈중심부로 나가기 위해선 소하라를 지나야
한다. 여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인
타케자키 스에나가의 첫 전투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스에나가가 싸웠던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몽고
습래 회사 화면에도 일본군은 소하라에서
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스에나가가 싸우는
그 장면은 소하라 진입한 고려군과 일본의
무사들이 싸웠던 전투 장면이라고 추정"

고려 몽고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곳이 바로 나가사키현 타카시마다
이곳엔 7백여년전의 침몰선이 인양돼 있다
배는 오랜 세월에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그 조각들이 남아있다.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돌절구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인양된 유물 중에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있다
1994년 타케시마 해역의 고우자키항에서
출토된 소나무 닻이다
놀랍게도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됐다.
그런데 인양시 닻에는 이 두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돌의 크기는 2미터.
이것은 닻의 하나가운데 박았던 돌이다.
닻돌이라고 한다.
하카다만 연안의 해저에서 인양된 닻돌은
모두 6개.

하코자키궁에도 닻돌 하나를 전시하고 있다.
이 닻돌엔 고려 몽고 연합 함대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 돌닻은 고려 전라도 장흥 천관산에서
난 돌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오는 이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이 돌은 일본에서 보기드믄
적색 응회암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닻돌은 전라남도 장흥 천관산의
돌과도 성분이 일치했다
전라남도 장흥 천관산.
일본 원정에 쓰인 배는 천관산 나무와 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고려사 기록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조선장터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그당시 조선소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 조선 장터 혹은 장터로만 불리던 그
이전 몇집 안되던 촌락 배를 만들 때 그 함선을
갑작스럽게 만들려고 보니까 많은 사람들 조선공
장사치들이 모여 아주 큰 마을 형성 그때는 장터
조선 장터 라고 불렀다"
바다가 간척되기 전, 죽청 마을은 큰 선박이
드나들던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포구였다.


일본 원정에서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김방경 장군
경북안동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대몽항쟁의 영웅이었던 그는 몽고와 강화한후
일본원정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2만여명으로 이루어진 고려군을 이끌고
1274년 10월 지금의 마산인 합포를 떠난다
연합군의 상륙지는 모두 세곳. 그중 ★김방경부대는
소하라 지역으로 상륙한다.

쿄토 근교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신사.
여기에 보관돼 있는
'팔만 우동기'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원구 사료관에는 연합군의 전투 방식을
알수 있는 유물이 있다
당시 전쟁에서 사용된 징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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