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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3회 안사연 여름캠프 보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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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김발용 작성일04-08-09 20:05 조회1,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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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3회 안사연 여름캠프 보고(3)         


◆08:05 세덕사 - 08:15 수리2구(숫골) 着         
                
수리(壽里)는 일명 ‘숫골’로 불리는데 부자독립운동공적비(父子獨立運動功        
績碑)가 있는 곳입니다.         
                
숫골로 가는 길은 증평 읍내에서 금왕ㆍ음성 방향으로 달리다가 소수3거리        
(08:12)에서 우회전해서 수리교(08:13)를 건너시면 됩니다. 숫골은 한때        
10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는데 90여 호가 모두 우리 일가분이셨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근동에서는 이곳에 사시는 일가분들을 가리켜 숫골김씨        
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부자독립운동공적비가 서 있는 곳은 형식 옹의 고택 뒤편입니다. 형식 종친        
을 비롯해 참판공(휘 기) 후손들과 마을이장 안렴사공파 한식 종친께서 우        
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느티나무 고목이 눈길        
을 끄는 부자독립운동공적비로 향합니다.         
                
부자독립운동공적비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김용응, 김태규 선생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형식 종친이 바로 독립운동가 김용응        
선생의 손자이십니다. 형식 종친에 대해서는 항용 종친께서 우리 홈에 자세        
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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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응 선생은 장릉 참봉을 지내시다가 독립운동에 가담,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조달에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이        
일로 왜경에 체포돼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습니다.         
                
아들 김태규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0월 상해에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충북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돼 1919년 11월 국내에 들어왔다가 1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공적비 주위에는 형식 종친께서 만년에 그리고 계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        
습니다. 형식 종친께서는 이 작품 중에서 ‘채꾼’이라는 작품을 대표작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밝은 달밤에 채꾼(소몰이꾼)들이 신작로로 소를 몰고 가        
는 유화입니다. 어딘가 슬픈 자국이 남아 있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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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년 전만 하더라도 채꾼들이 이곳을 수없이 지나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이 잠시 쉬었다 가던 ‘마구간’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부자독립운동공적비 옆에 서 있는 오래 된 비석은 김상일 공의 공적비입니        
다. 오랜 세월에 몇 글자가 마멸되었습니다. 김상일 공은 김규년 공의 손자        
로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지 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        
선정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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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고종 황제와 사주(四柱)가 일치하기도 합니다. 그 인연으로 특별히        
몽은(蒙恩 : 은혜나 은덕을 입음)한 것을 기려 1933년에 사감정(四感亭)을        
세우게 됩니다. 그 정자가 공적비 건너편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공적비 설명을 마친 형식 종친께서는 “이제 우리는 통일을 생각해야 할 때”        
임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 목소리에서 오랜 세월 이념의 최전선을 넘나        
들던 진심과 안타까움을 듣습니다.         
                
                
◆08:45 공적비 - 08:53 참판공 후손 가족묘원 着         
                
참판공(휘 기) 후손 가족묘원은 공적비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있        
습니다. 차량으로 불과 5분 내외 거리입니다.         
                
참판공은 5甲 형제분 중 3째분이신 참봉공(휘 우갑)의 손자이십니다.         
                
                
△참봉공(휘 우갑) → 3子 판관공(휘 時亮) → 3子 참판공(휘 紀)         
                
                
참판공의 후손이 방금 전에 말씀드린 부자 독립운동가 김용응 공과 그 아드        
님 김태규 공입니다. 이외에도 김태동 전 교통부장관, 김학응 충남ㆍ충북        
지사, 김태길 박사 등이 널리 알려지신 분입니다. 묘역에 도착하니 참판공        
의 13대 종손 한식 종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식 종친께서는 괴산군        
수를 역임하신 바 있습니다.         
                
                
이곳은 본래 참판공의 유택으로 납골묘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묘원에는        
영모전(永慕殿)이라 새기고, 주위를 화강암 장대석으로 쌓은 다음 봉분에        
잔디를 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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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원 아래쪽에는 무인석 1쌍을 배치하고, 봉분 옆에는 예전 묘비석과 묘표        
를 배치했습니다. 이외에 문인석과 동자석, 망주석 각 1쌍이 예전 그대로이        
며,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화병 등은 새로 배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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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비석에는 ‘정사공신병조참판 안동김공 기(紀)지묘, 배 정부인 영일정씨부’        
라 적혀 있습니다. 옛 봉분이 합봉이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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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 비석에는 ‘가선대부 행 용양위부호군 안동김공 정신(鼎臣)지묘, 배 정        
부인 고령신씨 부우(祔右), 배 정부인 양성이씨 부우(祔右), 배 정부인 한양        
조씨 부좌(祔左)’라 적혀 있습니다. 부호군공(휘 정신)은 참판공의 4남 1녀        
중 맏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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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ㄷ자 형태로 납골함을 모실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한식 종친 말씀        
으로는 앞으로 약 300년간 후손들 묘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        
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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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5 가족묘원 - 10:40 능촌리 마을회관 着         
                
09:35분 수리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괴산 시내로 들어가 연료를 채우고 충        
민사로 향합니다. 그러느라 근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충민사 건너편 주        
차장에 답사팀 여자분들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남자 종친들만 능촌리로 향        
합니다.         
                
10:40분 능촌리 마을회관에는 문영공파종회장 학응 종친을 비롯해 제학공        
파종회 총무 태옥 종친, 문숙공 후손이신 영수, 성수 형제분 등 일가분들이        
나와 계십니다. 본래 지명은 방아재인데 영상공 묘소로 인해 능말이라고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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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제학공파 영상공(휘 석) 후손들의 500년 세거지로서 제학공파 성지        
이자 최대 집성촌입니다. 좀더 좁혀 보면 5甲 형제분 중 휘 충갑, 휘 제갑        
할아버지 후손들이 모여 사시는 곳입니다. 5甲 형제분은 충갑(忠甲), 효갑        
(孝甲), 우갑(友甲), 제갑(懠甲), 인갑(仁甲)이신데, 둘째 분(휘 효갑)께서는        
자손이 없으십니다. 셋째 분(휘 우갑) 후손들은 숫골에, 막내 분(휘 인갑)        
후손이 증평 등지에 거주하십니다.         
                
영상공은 충렬공 7세 손으로 조정암(조광조)을 추종하던 당대의 선비로서        
한양 주자동(현 충무로 극동빌딩 앞)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조정암 선        
생이 사화로 인해 그 후학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영상공께서 이곳으로 낙향        
하시게 되면서 5갑 형제를 양육하시게 된 것입니다.         
                
특히 큰아드님 충갑께서는 퇴계 선생과 친분이 두터워 넷째 동생 제갑을 자        
신이 직접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학업을 닦게 하신 바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맏형이 어린 동생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릅        
니다.         
                
휘 제갑께서는 임진왜란 당시 원주목사로서 원주산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        
우시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신 문숙공이십니다. 원주산성 문숙공 유적지는        
안사연에서 답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3대첩 중 으뜸인 진주대첩을 이끌어 내신 충무공(휘 시민)        
이 바로 구암공(휘 충갑)의 둘째 아드님이시니 문숙공(휘 제갑)의 조카이십        
니다. 말 그대로 능골은 충절의 본향입니다.         
                
                
◇참판공 재실과 연천공 영정각         
                
우리 일행은 마을 종친들의 안내로 참판공(휘 언묵) 재실로 들어가 큰절을        
올립니다. 이곳에는 참판공을 비롯한 14분의 할아버지와 배위 총 29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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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공 재실         
헌관 : 상석         
집례 : 태옥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그런 다음 바로 옆의 연천공 영정각으로 들어갔습니다. 연천공(휘 가행)께        
서는 경기도 연천군수로 재직하실 당시 연천 백성들이 생사당을 지을 정도        
로 선정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연정각은 연천공께서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        
로 돌아오신 6년 뒤에 후손들이 연천에서 이곳 괴산으로 봉환하였다고 합        
니다.         
                
영정은 생전에 그려 모신 것으로 진본은 모처에 보관 중이며, 영정각 내의        
영정은 모사본입니다. 그러나 모사본 역시 생전의 연천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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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말 미륵불         
                
영정각 옆 고개에는 미륵불이 서 있습니다. 이 미륵불은 언제 조성되었는지        
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암석의 윗부분        
만 조각하고, 그 외에는 몸체에 박힌 석영 띠를 있는 그대로 살려 옷깃과 염        
주를 표현한 조각 기법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 아름다움을 탐낸 모씨가 이        
미륵불을 몰래 가져간 것을 우연히 제보를 입수해 되찾게 되었답니다. 그        
이후 다시 도난당하지 않도록 마을에서 가까운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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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공(휘 時讓) 신도비         
                
미륵불을 뒤로 하고 고개를 넘어가면 거대한 하담공(휘 시양) 신도비가 있        
습니다. 이 신도비도 마을 앞을 흐르는 괴강 가(백곡 할아버지 유적지 취묵        
당으로 가는 강가)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한성부 우        
윤 이정영 공이 쓰고(書幷篆), 익원공파 눌암(휘 찬) 할아버지 사위이신 조        
경 공께서 비문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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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공 묘역         
                
신도비 옆 오솔길로 올라서면 영상공(휘 석)을 비롯한 웃대 할아버지 묘역        
입니다. 맨 위가 참판공(휘 언묵)의 배위이신 정부인 의성김씨 묘소입니다.        
참판공 묘소는 경기도 소래산에 있습니다. 이곳 역시 항용 종친의 안내로        
안사연에서 참배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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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가 능말 입향조이신 영상공(휘 석) 묘소입니다. 문인석, 동자석, 석        
양(石羊)이 각각 1쌍이며, 장명등과 상석 및 부속 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동자석만 오래 된 석물이며, 그 외에는 30년 전에 새로 세운 것        
입니다. 묘표에는 성균진사 김공지묘, 배 행주기씨 지묘, 묘비에는 증 의정        
부 영의정 행세자사 김공지묘, 증 정경부인 행주기씨지묘라 새겨져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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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공 묘소         
헌관 : 상석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영상공 아래가 비안공(휘 인갑) 묘소입니다. 동자석과 망주석이 각각 1쌍        
이며, 상석이 큰 편입니다. 비문은 하담공(휘 시양)께서 지으셨습니다.         
                
                
비문에는 조산대부 행비안현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김공지        
묘, 증 정부인 남양홍씨지묘가 음각돼 있으나 좌찬성에 증직되신 분이십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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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공 묘소         
헌관 : 희준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일정 때문에 하담공 신도비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습니다.        
성수 종친께서는 이 비문의 글씨체와 내용 때문에 대학원생들이 종종 찾아        
와 탁본을 떠 간다고 들려 주십니다.         
                
                
                
◇하담공 묘소         
                
신도비 오른쪽 묵밭을 헤치고 산으로 오르니 하담 할아버지 묘소입니다. 봉        
분이 어른 걸음으로 34보로 매우 크며,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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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물은 문인석, 망주석 각 1쌍과 상석 및 부속 석물들입니다. 혼유석이 큰        
편인데 혹시 예전 상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석에는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선청백리 시 충익 안동김공 휘 시양, 배 정경부인 경주이씨지묘        
자좌’라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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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동자석이 1쌍 있었는데 몇 해 전에 몹쓸 손을 타서 분실되었다고 합        
니다. 하담공에 대해서는 우리 홈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상세 내용은        
생략합니다. 하담공 묘하에는 마부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작은 무덤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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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담공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상석         
집사 : 용주         
사준 : 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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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휘 제갑) 재실         
                
하담공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고개를 넘어 문숙공 재실로 향합니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고추가 빨갛게 물들어 갑니다. 어느덧 12시를        
조금 지났습니다.         
                
성수 종친께서 보관 중이신 충효열 3정려 판각을 살펴보고 문숙공 재실로        
들어가 참배를 올립니다. 재실 안에는 문숙공을 비롯한 후손 12분과 배위        
14분 총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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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공 재실         
헌관 : 윤만         
집례 : 영수         
집사 : 항용         
사준 : 상석         
                
                
맨 오른쪽에 모셔진 문숙공 위패에는 ‘증 대광보국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행 통정대부 수 충청도관찰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겸 원주목사 증 시(諡) 문숙공’, ‘배 정경부인 파평        
윤씨’, ‘배 정경부인 완산이씨’라 쓰여 있습니다.         
                
                
문숙공께서 원주산성에서 장렬히 순국하시자 정경부인 완산이씨께서 순절        
하시고, 아드님 휘 시백께서는 아버님 시신을 부여안고 왜적의 칼날을 피하        
지 않으시니 한날한시에 충ㆍ효ㆍ열 3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숙공의 순절 기록은 일전에 안사연 답사팀이 원주산성에 관한 보고를         
드린 바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문숙공 후손이신 영수 종친께서는 당시         
문숙공의 시신을 완전한 형태로 찾지 못해 늘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휴재공(휘 徽) 묘소         
                
문숙공 재실을 나와 그 뒤편에 있는 사휴재공의 묘소로 향합니다. 사휴재공        
께서는 하담공의 아들로 바른 소리를 잘 하신 분이십니다. 1646년 인조 24        
년 회빈 민씨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자 정언(正言)으로서 사사(賜死)하게 된        
배후를 규명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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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려 조선시대의 뛰어난 화가로 손꼽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경유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셨습니다.         
                
                
◇문숙공 묘소         
                
문숙공 시신은 공의 넷째 아들 직장공(휘 시걸)께서 밤에 몰래 성으로 들어        
가 모시고 나와 달래강 가에 임시로 모셨다가 배편으로 왜군을 피해 이곳까        
지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성수 종친의 안내로 문숙공 묘소로 올라갑니다.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각각 1쌍씩 배치돼 있으나, 영의정으로 추증되신 분의 묘소로는 검소하기        
만 합니다. 묘소는 쌍분인데 비문에는 문숙공 안동인 김의제,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 증 정경부인 완산이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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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공 묘소         
헌관 : 용환         
집사 : 항용         
사준 : 상석         
                
                
그 오른쪽에 21세의 나이로 아버님을 따라 돌아가신 휘 시백 할아버지 설        
단입니다. 휘 시백 할아버지께서는 후에 호조참의로 증직되셨습니다. 비문        
에는 참의공 김시백지단, 숙부인 죽산박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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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의공 단소         
헌관 : 용준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13:05 세덕사 - 13:20 충민사 着         
                
일정에 쫓겨 아쉽게도 괴강을 굽어보는 취묵당에 들르지 못하고 다시 충민        
사로 향합니다. 충민사에는 쉬는 날인데도 태옥 종친의 부탁으로 충민사 자        
원봉사 해설사(이만숙 씨)께서 벌써 두어 시간째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        
다.         
                
강 건너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충민사 전경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송구        
스런 마음으로 충무교를 건너 충민사에 도착하자 이 해설사는 환한 웃음으        
로 맞아 주십니다. 5분 정도 자세한 해설을 듣고 충민사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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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에는 충무공(휘 시민) 영정과 교지 원본, 진주성 촉석루 그림이 모셔        
져 있습니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영정은 충무공 생시의 모습 그대로를 연        
상케 합니다. 충민사 아래에는 충무공과 문숙공의 웅장한 신도비가 각각 1        
기씩 서 있습니다. 충무공 신도비는 안동인 권영직 씨가 비문을 짓고,        
우리 종친이신 김사달 박사가 썼습니다. 문숙공 신도비문은 권영직 씨, 글        
씨는 12대 방손 상형 종친께서 썼습니다. 그 맞은편에 김시민 장군 유적정        
화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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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뒤가 충무공 묘소인데 원래 중원군 살미면 신당리 무릉동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하신 충무공 시신을 모셔 오던        
중 무릉동을 지나던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그곳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충        
주호 건설로 1979년에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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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준공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때마침         
10ㆍ26사태가발생했는데, 충민사 건너편 주차장 자리가         
헬기 이착륙장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암공(휘 충갑) 묘역         
                
충민사 옆으로 옛 사당이 있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m쯤 가면 충무공        
의 아버님이신 구암공(휘 충갑)과 구암공의 맏손자 송화공(휘 緯) 묘역입니        
다.         
                
                
△구암공(휘 충갑) → 1子 부평공(휘 시회) → 1子 송화공(휘 위)         
                
△구암공(휘 충갑) → 2子 생원공(휘 시각), 3子 충무공(휘 시민), 4子 감정        
공(휘 시신), 5子 교관공(휘 시진), 6子 창성공(휘 시약)         
                
                
이 두 분의 묘소는 충무공 묘소를 천봉할 때 같이 옮겨 모셨습니다. 이때 송        
화공 묘소에서 미이라 상태의 시신과 함께 의복이 여러 점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의복은 중요 민속자료 118호로 현재 충북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주회 종친께서 우리 홈에 올리신        
답사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암공 묘소에는 신도비와 묘표, 문인석, 망주석 각 1쌍, 장명등, 상석 및        
부속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묘표에는 사헌부지평 겸 춘추관기주궁 김공        
지묘, 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상락군 행 중훈대부라 적혀 있습니다. 송화공        
묘소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및 부속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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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공 묘소         
헌관 : 태우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 송화공 묘소         
헌관 : 발용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글 김윤식, 사진 김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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