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국의 『한국은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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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실 작성일04-08-16 16:11 조회1,607회 댓글0건본문
한국인의 애국심과 자존심(1) ---2004. 3.15---
[한국은 중국교포를 너무 모른다]가 상, 하로 두 번 게재된 뒤 내가 가장 안스럽고 미안했던 것은 지난 2년동안 끊임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동조해주셨던 신세묵사장님, 한춘섭시조시인, 리보은실장님, 김용삼선생, 그리고 나에게 2년간 학문을 가르쳐왔던 대학원의 교수님들이었다. 길러준 개가 도리여 주인을 문다는 식으로 2년동안 무료로 글을 가르쳐주고 돈을 주고 맛나는 음식을 사주고 했는데 무슨 불만이 있어 이런 당치도 않는 글까지 썼느냐고 그들이 불만을 토로한다면 나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외에는 아무런 할말도 없다.
하나 그들은 한국을 비판하는 나의 글을 보고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겸손까지 보여주면서 설사 잘못된 지적이라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기보다 한국과 중국교포문제를 풀어나가는데 훨씬 유익하다고 말해주어 귀국하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글이 게재된 월간지 구독자들도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아메리카 익스프레스은행에서 과장직에 있는 리 클라라라고 하는 분은 나의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한번 만날 수 없느냐는 제의까지 해왔다. 원래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녀의 제의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쾌히 받아들이고 이튿날로 우리는 [서울신문사]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나의 글의 문제점을 흠잡고 많은 이의를 제기해오리라 생각했다.
하나 그게 아니였다. 그녀는 남편이 모는 자가용차에 앉아 나의 글을 무심히 보다가 너무나 감동되고 서러워 아이처럼 소리내여 울었다는 고백부터 했다.
한국과 중국교포간의 문제점,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제기한 나의 글을 보고 울었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언뜻 리해가 가지 않았다. 하나 그녀의 생각은 글을 쓴 나의 생각보다도 한층 높은 차원에 가있었다. 그녀는 나의 글을 읽고 똑같은 민족인 우리사이에 이렇듯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왔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다음 내가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을 갖고 중국으로 돌아갈가봐 걱정되기라도 하듯 한국은 된다, 한민족은 된다는 말을 구체적인 실례까지 들어가면서 나에게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나서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런 글을 쓸수 있은 것은 한국이 된다고 생각되여 쓴 것이지 안된다고 생각되여 쓴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약하고 안되는 나라라면 저는 외려 좋은 말만을 가득 하고 귀국할 것입니다. 만약 저더러 한국의 좋은 점만을 떠올리는 글을 쓰라고 한다면 아마 서너권정도는 쉽게 써낼것입니다. 제가 한국을 비판하는 글을 이렇듯 힘겹게 쓴 것으로 보아 한국은 확실히 좋은 나라인것같습니다.”
나의 말에 리 클라라씨는 행복하게 웃었다. 갈라지기전에 그녀는 오늘 특별히 만나자고 한 것은 한국에서 어렵게 사는 선생님에게 약간한 도움을 주고싶어서였다면서 품속에 넣고 온 돈봉투를 내보였다. 물론 욕심나는 돈이였지만 나는 나의 글을 읽고 내가 불쌍하게 보였다면 대단한 착각이라는 말과 함께 정 나를 도와주고싶으시다면 내가 귀국한 뒤 1년에 한두번씩 리 클라라씨가 다 읽고난 책 한두권을 보내주신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
내가 귀국한지 두달만에 리 클라라씨는 나에게 리규태가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 6권을 항공편으로 보내왔고 며칠전에는 내가 소장하고싶었던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을 또 보내왔다. 그리고 이후 조정래의 『아리랑』을 부쳐주겠다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맞벌이 부부로 어렵게 살아가는 그녀로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는 듯해서 나는 당초 내가 일년에 한두번씩 책을 보내달라는 말을 그렇듯 무심히 그리고 별생각 없이 했던 자신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리 클라라씨를 만나고난 며칠 뒤 나는 또 한국 이동통신 마케팅부문장이며 전무리사인 김수필전무의 전화를 받았다. 그도 역시 그 월간지를 통해 김재국씨의 글을 잘 읽었다면서 시간을 짜내 한번 만날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이튿날 나는 힐튼호켈 커피숍에서 김수필전무와 박만식부장을 함께 만났다.
김전무님은 우선 나의 글을 읽게 된 경위부터 죽 이야기했다. 그는 박부장과 함께 미국으로 해외출장을 갔다가 비행기에서 나의 글을 읽었다고 했고 글을 읽고난 뒤 생각한바가 많았다고 했다. 기업인으로서 중국교포들이 고국에로 와서 어렵게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면서 서울에서 공부하는 중국교포학생들에게 장학금형식으로 적당히 돈을 지원하고싶다는 뜻도 내비치었다.
나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핑그르르 고이고있었다. 나는 목이 메여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교포학생 모두가 다 들어야 할 그 따뜻한 말씀을 나혼자 듣고있는 현실이 야속하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돈보다도 더 소중했던 그 고마운 마음, 그 마음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것이였다. 그날 나는 장학금을 주고싶다는 김전무님의 뜻을 이런식으로 사절했다.
“전 류학생활을 어렵게 하는것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어렵게 류학생활을 한 것 아닙니까? 하나 그들은 오늘 모두 한국의 각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중국류학생들에게 돈을 주는 사치보다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길을 틔여주는 것이 진짜 중국류학생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2년동안 저는 아르바이트를 몰래 하면서 한국을 많이 알았고 많이 배웠습니다.”
나는 중국류학생대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하나 나의 이 말이 중국교포 류학생들의 마음은 얼마간 대표할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김전무님은 할수 없다는 듯 두팔을 펼쳐보이며 유쾌하게 웃으시었다. 그다음 자못 정색한 얼굴로 “김재국씨가 한국으로 와서 가장 하고싶었던 일이 무엇이였느냐?”고 물어왔다.
“한국땅을 고루 다 밟아보는 일이였습니다.”
“그래 다 밟아보았습니까?”
김전무님께서 흥미있다는 듯 물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한국땅 전 지역을 다 돌아보면서 “한라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라는 장편기행문을 쓰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한국으로 나올 때 이미 계획했던 일이였다. 하나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라는 로씨야 빅토르 최(교포가수)의 노래처럼 나의 처지가 바로 그랬다. 당초 내가 계획했던것처럼 여름방학 두달간을 리용하여 도보로 한국을 돌자면 적어도 2백만원의 목돈을 손에 쥐여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땅 전 지역을 기어이 다 돌려고 생각한 것은 첫째는 기행문을 써서 고국을 정확하게 중국에 알리고싶은 목적에서였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밟아보고싶어했던 고국땅을 내가 대신 밟는 것으로 천국에 가계시는 그 억울한 혼들을 달래주려는 목적에서였고 셋째는 한국사람들에게 중국교포가 약장사나 불법체류를 하면서 돈만 긁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국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귀국하기전에 그 소원을 성취하시오. 우리가 힘이 되어주겠으니까 돈근심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전무님은 나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다음 나의 사양하는 말도 들어보려 하지 않고 일이 바쁘다면서 총총히 나와 갈라졌다.
며칠후 그들은 나에게 노트북 하나와 돈 백만원을 보내왔다. 사랑고 믿음이 한가득 담긴 그 소중한 선물로 나는 지난해 12월 1일부터 금년 1월 1일까지 약 한달간 제주도, 목포, 여수, 순천, 라주, 광주, 전주, 남원, 진주, 마산, 부산, 경주, 포항, 안동, 대구, 구미, 대전, 청주, 충주, 춘천, 공주, 부여, 여주, 인천, 수원, 통일전망대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고국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마음껏 노트북에 담아쓰고 고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껏 사전에 담았다. 그리고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 지례마을에 있는 우리 안동김씨의 시조인 김방경할아버지의 묘소로 찾아가 “중국에 사는 손자 김재국이 왔습니다.” 하면서 정중히 절을 올리기도 했다.
-김재국의 『한국은 없다』(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8)에서
[한국은 중국교포를 너무 모른다]가 상, 하로 두 번 게재된 뒤 내가 가장 안스럽고 미안했던 것은 지난 2년동안 끊임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동조해주셨던 신세묵사장님, 한춘섭시조시인, 리보은실장님, 김용삼선생, 그리고 나에게 2년간 학문을 가르쳐왔던 대학원의 교수님들이었다. 길러준 개가 도리여 주인을 문다는 식으로 2년동안 무료로 글을 가르쳐주고 돈을 주고 맛나는 음식을 사주고 했는데 무슨 불만이 있어 이런 당치도 않는 글까지 썼느냐고 그들이 불만을 토로한다면 나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외에는 아무런 할말도 없다.
하나 그들은 한국을 비판하는 나의 글을 보고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겸손까지 보여주면서 설사 잘못된 지적이라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기보다 한국과 중국교포문제를 풀어나가는데 훨씬 유익하다고 말해주어 귀국하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글이 게재된 월간지 구독자들도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아메리카 익스프레스은행에서 과장직에 있는 리 클라라라고 하는 분은 나의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한번 만날 수 없느냐는 제의까지 해왔다. 원래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녀의 제의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쾌히 받아들이고 이튿날로 우리는 [서울신문사]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나의 글의 문제점을 흠잡고 많은 이의를 제기해오리라 생각했다.
하나 그게 아니였다. 그녀는 남편이 모는 자가용차에 앉아 나의 글을 무심히 보다가 너무나 감동되고 서러워 아이처럼 소리내여 울었다는 고백부터 했다.
한국과 중국교포간의 문제점,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제기한 나의 글을 보고 울었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언뜻 리해가 가지 않았다. 하나 그녀의 생각은 글을 쓴 나의 생각보다도 한층 높은 차원에 가있었다. 그녀는 나의 글을 읽고 똑같은 민족인 우리사이에 이렇듯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왔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다음 내가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을 갖고 중국으로 돌아갈가봐 걱정되기라도 하듯 한국은 된다, 한민족은 된다는 말을 구체적인 실례까지 들어가면서 나에게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나서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런 글을 쓸수 있은 것은 한국이 된다고 생각되여 쓴 것이지 안된다고 생각되여 쓴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약하고 안되는 나라라면 저는 외려 좋은 말만을 가득 하고 귀국할 것입니다. 만약 저더러 한국의 좋은 점만을 떠올리는 글을 쓰라고 한다면 아마 서너권정도는 쉽게 써낼것입니다. 제가 한국을 비판하는 글을 이렇듯 힘겹게 쓴 것으로 보아 한국은 확실히 좋은 나라인것같습니다.”
나의 말에 리 클라라씨는 행복하게 웃었다. 갈라지기전에 그녀는 오늘 특별히 만나자고 한 것은 한국에서 어렵게 사는 선생님에게 약간한 도움을 주고싶어서였다면서 품속에 넣고 온 돈봉투를 내보였다. 물론 욕심나는 돈이였지만 나는 나의 글을 읽고 내가 불쌍하게 보였다면 대단한 착각이라는 말과 함께 정 나를 도와주고싶으시다면 내가 귀국한 뒤 1년에 한두번씩 리 클라라씨가 다 읽고난 책 한두권을 보내주신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
내가 귀국한지 두달만에 리 클라라씨는 나에게 리규태가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 6권을 항공편으로 보내왔고 며칠전에는 내가 소장하고싶었던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을 또 보내왔다. 그리고 이후 조정래의 『아리랑』을 부쳐주겠다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맞벌이 부부로 어렵게 살아가는 그녀로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는 듯해서 나는 당초 내가 일년에 한두번씩 책을 보내달라는 말을 그렇듯 무심히 그리고 별생각 없이 했던 자신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리 클라라씨를 만나고난 며칠 뒤 나는 또 한국 이동통신 마케팅부문장이며 전무리사인 김수필전무의 전화를 받았다. 그도 역시 그 월간지를 통해 김재국씨의 글을 잘 읽었다면서 시간을 짜내 한번 만날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이튿날 나는 힐튼호켈 커피숍에서 김수필전무와 박만식부장을 함께 만났다.
김전무님은 우선 나의 글을 읽게 된 경위부터 죽 이야기했다. 그는 박부장과 함께 미국으로 해외출장을 갔다가 비행기에서 나의 글을 읽었다고 했고 글을 읽고난 뒤 생각한바가 많았다고 했다. 기업인으로서 중국교포들이 고국에로 와서 어렵게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면서 서울에서 공부하는 중국교포학생들에게 장학금형식으로 적당히 돈을 지원하고싶다는 뜻도 내비치었다.
나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핑그르르 고이고있었다. 나는 목이 메여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교포학생 모두가 다 들어야 할 그 따뜻한 말씀을 나혼자 듣고있는 현실이 야속하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돈보다도 더 소중했던 그 고마운 마음, 그 마음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것이였다. 그날 나는 장학금을 주고싶다는 김전무님의 뜻을 이런식으로 사절했다.
“전 류학생활을 어렵게 하는것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어렵게 류학생활을 한 것 아닙니까? 하나 그들은 오늘 모두 한국의 각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중국류학생들에게 돈을 주는 사치보다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길을 틔여주는 것이 진짜 중국류학생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2년동안 저는 아르바이트를 몰래 하면서 한국을 많이 알았고 많이 배웠습니다.”
나는 중국류학생대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하나 나의 이 말이 중국교포 류학생들의 마음은 얼마간 대표할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김전무님은 할수 없다는 듯 두팔을 펼쳐보이며 유쾌하게 웃으시었다. 그다음 자못 정색한 얼굴로 “김재국씨가 한국으로 와서 가장 하고싶었던 일이 무엇이였느냐?”고 물어왔다.
“한국땅을 고루 다 밟아보는 일이였습니다.”
“그래 다 밟아보았습니까?”
김전무님께서 흥미있다는 듯 물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한국땅 전 지역을 다 돌아보면서 “한라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라는 장편기행문을 쓰려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한국으로 나올 때 이미 계획했던 일이였다. 하나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라는 로씨야 빅토르 최(교포가수)의 노래처럼 나의 처지가 바로 그랬다. 당초 내가 계획했던것처럼 여름방학 두달간을 리용하여 도보로 한국을 돌자면 적어도 2백만원의 목돈을 손에 쥐여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땅 전 지역을 기어이 다 돌려고 생각한 것은 첫째는 기행문을 써서 고국을 정확하게 중국에 알리고싶은 목적에서였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밟아보고싶어했던 고국땅을 내가 대신 밟는 것으로 천국에 가계시는 그 억울한 혼들을 달래주려는 목적에서였고 셋째는 한국사람들에게 중국교포가 약장사나 불법체류를 하면서 돈만 긁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국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귀국하기전에 그 소원을 성취하시오. 우리가 힘이 되어주겠으니까 돈근심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전무님은 나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다음 나의 사양하는 말도 들어보려 하지 않고 일이 바쁘다면서 총총히 나와 갈라졌다.
며칠후 그들은 나에게 노트북 하나와 돈 백만원을 보내왔다. 사랑고 믿음이 한가득 담긴 그 소중한 선물로 나는 지난해 12월 1일부터 금년 1월 1일까지 약 한달간 제주도, 목포, 여수, 순천, 라주, 광주, 전주, 남원, 진주, 마산, 부산, 경주, 포항, 안동, 대구, 구미, 대전, 청주, 충주, 춘천, 공주, 부여, 여주, 인천, 수원, 통일전망대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고국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마음껏 노트북에 담아쓰고 고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껏 사전에 담았다. 그리고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 지례마을에 있는 우리 안동김씨의 시조인 김방경할아버지의 묘소로 찾아가 “중국에 사는 손자 김재국이 왔습니다.” 하면서 정중히 절을 올리기도 했다.
-김재국의 『한국은 없다』(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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