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김응하 장군 전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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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실 작성일04-08-19 21:44 조회1,895회 댓글0건본문
▣ 김응하 장군 전사지 ▣
청 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무순성(撫順城)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최후의 일전을 무순 동남쪽에 있는 사얼후에서 벌일 양으로 47만에 이르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출병 중이던 강홍립(姜弘立) 도원수 휘하의 2만 조선군도 이 사얼후의 일익을 담당,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청나라 측 문헌에 보면 이 결전이 붙었을 때 모래바람이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어둠에서 밝은 쪽을 향해 공략하게 되어 백발백중인데,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밝은 데서 어둠을 향해 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포탄 모두가 버드나무에만 맞을 따름이었다.
사서(史書)는 이 사얼후 대패를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고 피는 흘러 개울을 이루었으며, 기치(旗幟)와 사졸(死卒)들이 혼하(渾河)의 물길을 막았다.'
이 사얼후 전투 중에 도원수 강홍립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투항했으나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끝까지 사투, 우리 군사(軍史)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에도 길이 빛을 남기고 있다.
당시 우영(右營) 사령관이던 김응하 장군은 십 리를 두고 적군 6만 명과 대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을 가려 포와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이를 틈타 적군이 총공격을 펴 아진을 도륙하는데, 장군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방패삼아 활을 쏘아댐으로써 접근하는 적을 모조리 적중시켜 시체 밭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휘두르며 싸웠고, 칼이 부러지자 제 목숨을 아끼려고 나라를 저버린 도원수 강홍립을 꾸짖으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박살냈다고 장군의 묘비명은 적고 있다.
그는 열심히 싸우다 등 뒤에서 던진 적군의 창에 맞아 쓰러졌는데, 시체를 거두어 묻을 때까지도 부러진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 띤 눈을 감지 못하였다 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을 우러러 우리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의 가장 높은 벼슬인 요동백(遼東伯)에 봉했다. 그리고 적국인 청나라에서도 김응하 장군이 방패삼아 싸웠던 그 버드나무에 장군버들(將軍柳)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그 벼슬 이름이 연유가 되어 지명이 돼 내렸다던데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김응하 장군이 전사한 사얼후 산은 산이라기보다 표고 70미터에 불과한 둔덕이었다. 사망자 5만 명을 냈다는 결전의 고전장(古戰場)인 심하(深河)는 이제 대적방(大狄房)댐에 수몰되고 없었다. 다만 사신 길을 따라가던 박정길(朴鼎吉)이 짬을 내어 그 근처를 서성이다 남겨놓은 시 한수를 되 뇌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백 길의 심하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도 모래땅에 피흔적이 완연한데
강 위에서 장군의 혼을 부르지 말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이제는 강물이 아닌 댐에서 장군의 넋을 초혼해야 할 판이니 무상하지 짝이 없다.
청 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무순성(撫順城)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최후의 일전을 무순 동남쪽에 있는 사얼후에서 벌일 양으로 47만에 이르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출병 중이던 강홍립(姜弘立) 도원수 휘하의 2만 조선군도 이 사얼후의 일익을 담당,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청나라 측 문헌에 보면 이 결전이 붙었을 때 모래바람이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어둠에서 밝은 쪽을 향해 공략하게 되어 백발백중인데,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밝은 데서 어둠을 향해 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포탄 모두가 버드나무에만 맞을 따름이었다.
사서(史書)는 이 사얼후 대패를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고 피는 흘러 개울을 이루었으며, 기치(旗幟)와 사졸(死卒)들이 혼하(渾河)의 물길을 막았다.'
이 사얼후 전투 중에 도원수 강홍립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투항했으나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끝까지 사투, 우리 군사(軍史)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에도 길이 빛을 남기고 있다.
당시 우영(右營) 사령관이던 김응하 장군은 십 리를 두고 적군 6만 명과 대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을 가려 포와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이를 틈타 적군이 총공격을 펴 아진을 도륙하는데, 장군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방패삼아 활을 쏘아댐으로써 접근하는 적을 모조리 적중시켜 시체 밭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휘두르며 싸웠고, 칼이 부러지자 제 목숨을 아끼려고 나라를 저버린 도원수 강홍립을 꾸짖으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박살냈다고 장군의 묘비명은 적고 있다.
그는 열심히 싸우다 등 뒤에서 던진 적군의 창에 맞아 쓰러졌는데, 시체를 거두어 묻을 때까지도 부러진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 띤 눈을 감지 못하였다 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을 우러러 우리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의 가장 높은 벼슬인 요동백(遼東伯)에 봉했다. 그리고 적국인 청나라에서도 김응하 장군이 방패삼아 싸웠던 그 버드나무에 장군버들(將軍柳)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그 벼슬 이름이 연유가 되어 지명이 돼 내렸다던데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김응하 장군이 전사한 사얼후 산은 산이라기보다 표고 70미터에 불과한 둔덕이었다. 사망자 5만 명을 냈다는 결전의 고전장(古戰場)인 심하(深河)는 이제 대적방(大狄房)댐에 수몰되고 없었다. 다만 사신 길을 따라가던 박정길(朴鼎吉)이 짬을 내어 그 근처를 서성이다 남겨놓은 시 한수를 되 뇌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백 길의 심하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도 모래땅에 피흔적이 완연한데
강 위에서 장군의 혼을 부르지 말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이제는 강물이 아닌 댐에서 장군의 넋을 초혼해야 할 판이니 무상하지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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