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은 누구인가 - 천안 투데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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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8-22 23:01 조회1,571회 댓글0건본문
“市 홈페이지에 아직도 등재 안돼”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장군의 출생지인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 도 문화재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유적지.
지난 4월10일 김시민장군 유적지가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66호로 확정됐지만 천안 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이가 드물다.
그 이유로 허용기 위원장(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은 “유적지가 도 문화재로 지정된지 100여일이 지나도록 천안시청 홈페이지(cheonan.go.kr) 천안시넷 문화관광 문화재(기념물) 소개란에 등재되지 않은채 방치돼 있다”며 “시는 진입로 및 현장 안내표지판 설치, 각종 홍보물 제작, 생가지 복원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 유적지를 찾아가봤다.
<김시민은 누구인가>
김시민 장군은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태어나 25세 때인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진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임란 후 첫번째 대승인 진주대첩을 이끌어 낸 인물로 기록된다.
▲출생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했다.
▲유년기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했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무과 급제, 임진왜란 합세
장군은 1578년 무과에 급제, 부평부사와 진주판관으로 일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목사 대리직을 맡아 진주방향으로 침입한 왜적을 의병장 이달(李達),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격파했다.
장군은 이어 왜군이 점령했던 고성과 창원 등을 탈환한뒤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거창 사랑암으로 진출, 서남진하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1592년에는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장군은 1592년 12월26일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 2만여명을 맞아 3천8백여명의 병력으로 맞서 공방전을 벌인끝에 퇴각시켰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했으며 조정에서는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일화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라며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진주대첩이란>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중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으로 바람앞에 호롱불처럼 흔들렸던 국운을 지키기 위해 민관합심으로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다고 기록된다.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은 소수병력으로 왜의 대군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했다.
그때 나이 38세때다.
병력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김시민부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의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민관이 힘을 합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됐다.)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
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다양한 전술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
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하 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기와·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ㆍ관ㆍ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민ㆍ관ㆍ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분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 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깔보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효과를 창출하였다.
<역사적 평가>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진몰(陳沒)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훈련원 판관 재직시 낡고 녹슨 병기(兵器)와 해이된 군기(軍紀)를 보고 일조유사시 국가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상관인 병조판서에게 충심으로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자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자신의 정당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키려 한 올곧은 선비정신이 뛰어났으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하였고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케 한 것은 위험을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것이며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다.
<도 문화재로 지정된 까닭>
천안 태생이면서도 출생지에 사당이 없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당 등 사적지 건립이 시급하다는 지역시민단체 등의 여론에 따라 지난 5월 출범했다.
김시민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은 정부에서 각각 132만㎡, 198만㎡의 부지를 매입해 사적지를 조성한바 있으나 김시민 장군은 시민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향토유적지로 보존 가치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운영위원장 허용기)가 지난 2000년 시민사회단체로 발족했다.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운영위원장 허용기)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 대첩의 영웅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고귀한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그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2000년 7월 시민사회단체로 발족했다.
추진위는 그동안 1천3백여만원의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천안에 있는 안동 김씨 문중 소유의 토지 일부를 부지로 기부해 줄 것을 본격 협의해 왔다.
30억원이 소요될 충무공 사적지는 사당과 함께 각종 편의시설, 휴게시설을 갖춘 종합 사적지로 건립될 예정이며 완공 후 병천의 유관순 사우, 목천 독립기념관과 함께 천안의 대표적 사적관광지로 가꿔왔다.
입력 : 2004/07/20 특별취재반기자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장군의 출생지인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 도 문화재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유적지.
지난 4월10일 김시민장군 유적지가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166호로 확정됐지만 천안 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이가 드물다.
그 이유로 허용기 위원장(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은 “유적지가 도 문화재로 지정된지 100여일이 지나도록 천안시청 홈페이지(cheonan.go.kr) 천안시넷 문화관광 문화재(기념물) 소개란에 등재되지 않은채 방치돼 있다”며 “시는 진입로 및 현장 안내표지판 설치, 각종 홍보물 제작, 생가지 복원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 유적지를 찾아가봤다.
<김시민은 누구인가>
김시민 장군은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태어나 25세 때인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진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임란 후 첫번째 대승인 진주대첩을 이끌어 낸 인물로 기록된다.
▲출생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했다.
▲유년기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했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무과 급제, 임진왜란 합세
장군은 1578년 무과에 급제, 부평부사와 진주판관으로 일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목사 대리직을 맡아 진주방향으로 침입한 왜적을 의병장 이달(李達),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격파했다.
장군은 이어 왜군이 점령했던 고성과 창원 등을 탈환한뒤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거창 사랑암으로 진출, 서남진하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1592년에는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장군은 1592년 12월26일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 2만여명을 맞아 3천8백여명의 병력으로 맞서 공방전을 벌인끝에 퇴각시켰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했으며 조정에서는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일화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라며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진주대첩이란>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중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으로 바람앞에 호롱불처럼 흔들렸던 국운을 지키기 위해 민관합심으로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다고 기록된다.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은 소수병력으로 왜의 대군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했다.
그때 나이 38세때다.
병력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김시민부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의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민관이 힘을 합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됐다.)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
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다양한 전술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
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하 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기와·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ㆍ관ㆍ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민ㆍ관ㆍ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분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 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깔보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효과를 창출하였다.
<역사적 평가>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진몰(陳沒)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훈련원 판관 재직시 낡고 녹슨 병기(兵器)와 해이된 군기(軍紀)를 보고 일조유사시 국가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상관인 병조판서에게 충심으로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자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자신의 정당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키려 한 올곧은 선비정신이 뛰어났으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하였고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케 한 것은 위험을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것이며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다.
<도 문화재로 지정된 까닭>
천안 태생이면서도 출생지에 사당이 없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당 등 사적지 건립이 시급하다는 지역시민단체 등의 여론에 따라 지난 5월 출범했다.
김시민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에서 큰 전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은 정부에서 각각 132만㎡, 198만㎡의 부지를 매입해 사적지를 조성한바 있으나 김시민 장군은 시민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향토유적지로 보존 가치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운영위원장 허용기)가 지난 2000년 시민사회단체로 발족했다.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운영위원장 허용기)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 대첩의 영웅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고귀한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그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2000년 7월 시민사회단체로 발족했다.
추진위는 그동안 1천3백여만원의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천안에 있는 안동 김씨 문중 소유의 토지 일부를 부지로 기부해 줄 것을 본격 협의해 왔다.
30억원이 소요될 충무공 사적지는 사당과 함께 각종 편의시설, 휴게시설을 갖춘 종합 사적지로 건립될 예정이며 완공 후 병천의 유관순 사우, 목천 독립기념관과 함께 천안의 대표적 사적관광지로 가꿔왔다.
입력 : 2004/07/20 특별취재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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