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선(金惟銑)과 김유예(金惟銳)의 사위
페이지 정보
이왕섭 작성일04-08-23 13:54 조회1,874회 댓글0건본문
안녕하세여~~!!!
궁금한 것이 있어 확인을 부탁 드립니다.
김유선(金惟銑)의 사위 이자원(李子원), 김유예(金惟銳)의 사위 이혼(李混)이라는 인물이 있는지의 여부와 안동김문의 보첩에서의 그 내용들을 알고 싶습니다.
김유선(金惟銑)과 김유예(金惟銳)은 고려시대 인물입니다.
이자원의 아들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충)입니다. 이언충과 이혼에 대한 약력은 아래에 기록합니다.
==========================================================================
●이혼(李混) 1252(고종 39) ∼ 1312(충선왕 4). 8. 11
고려의 문신(文臣).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거화(去華)·태초(太初), 호는 몽암(蒙菴).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이천(李仟)의 아들이다.
1268년(원종 9)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참군(廣州參軍)이 되었고, 뒤이어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첨의사인(僉議舍人)을 거쳐 1287년(충렬왕 13) 12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1289년(충렬왕 15) 10월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1년(충렬왕 17) 12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문한학사 승지(文翰學士承旨)를 겸임하였다. 1293년(충렬왕 19) 12월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1295년(충렬왕 21) 1월 동지 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6년(충렬왕 22) 도당(都堂)에서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주모자로 혐의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파직 당하였다.
1297년(충렬왕 23) 12월 지 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兼) 세자 원빈(世子元賓)이 되고, 1298년 5월 검교 사공 서경 유수 평양 부윤(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에 임명되었으며 7월에 밀직사사 전조 판서 집현전 대학사 수국사(密直司使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가 되었다.
1299년(충렬왕 25) 5월 파직 당하였으며, 1303년(충렬왕 29) 7월 원나라에서 황제 명령을 받고 단사관(斷事官) 첩목아 불화(帖木兒不花), 한림(翰林) 이 학사(李學士)가 파견되어 왔을 때, 원충갑이 오잠(吳潛:초명은 吳祁)의 폐행 문제의 죄상을 일일이 지적한 글을 만들어서 첩목아 불화와 이학사에게 고발하자, 이에 홍자번(洪子藩) 등과 같이 연명으로 오기(吳祁:吳潛으로 개명)의 죄를 일일이 지적한 글을 첩목아 불화와 이학사에게 보내어 고발하였다.
1303년(충렬왕 29) 11월 지 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고, 1304년(충렬왕 30) 1월 판 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으며 6월에 《입학송(入學頌)》을 지었다.
1307년(충렬왕 33) 3월 도첨의 찬성사 판 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올랐다. 11월에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가서 그곳에 있던 충선왕과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밀직(密直), 중방(重房), 내시(內侍) 등 삼관(三官), 오군(五軍)을 모두 폐지하는 내용의 문건들을 가지고 1308년(충렬왕 34) 5월 돌아 왔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대사백(大詞伯)으로 임명되고 벽상삼한(壁上三韓)이 더해졌다.
얼마 안 되어 위위윤(尉衛尹)으로 치사(致仕)한 김양감(金良鑑)의 딸이며, 김문연(金文衍)의 여동생인 숙비(淑妃:淑昌院妃金氏)의 무함으로 회주목사(淮州牧使:淮陽)로 내려 갔다가 다시 예주 목사(禮州牧使)로 내려 갔다. 그 후에 소환되어 첨의정승(僉議政丞)이 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성질이 너그럽고 인정이 있었으나 오래 동안 전선(銓選:人事權)을 맡아 청백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손님을 좋아 하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겨 남쪽성 밖에 복산장(福山莊)이라는 별장을 지어 자주 왕래하였다.
시와 문장은 청아하고 간결하였으며 장단구(長短句) 약간 편이 세상에 전하며,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영해(寧海)로 적환(謫宦;죄과를 범하고 원방에 강직된 것)할 시기에 지은 〈무고 舞鼓〉가 《악부 樂府》에 전한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登科錄
●이언충(李彦 ) 1273.5.4生 ∼ 1338.10.20卒
고려의 문신(文臣).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입지(立之).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이천(李仟)의 손자이며 직문한서 증 대사성(直文翰書贈大司成) 이자원(李子원)의 아들로 문장공(文莊公) 이혼(混)의 조카[猶子]이다.
어머니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다.
1273년(고려 원종 14) 정사월(丁巳月) 을묘일(乙卯日)에 태어났다. 1292년(충렬왕 18) 임진(壬辰)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1294년(충렬왕 20) 갑오(甲午)년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관(內侍官)인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다. 여러번 전임하여 군부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 대사성(正獻大夫大司成)·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지제교(知製敎)· 통헌대부 검교 선부전서(通憲大夫檢校選部典書)· 행 전의령(行典儀令)· 겸사헌부집의(兼司憲執義)· 제점전부사사(提點典부司事)·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 행 평■부윤(行平■府尹)· 경상도 진변(慶尙道鎭邊) 행 ■주목사(行■州牧使)를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 개성부윤(開城府尹)· 좌상시((左常侍)· 판선공시(判繕工寺)· 밀직부사( 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 광정대부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1338년(충숙왕 06) 무인년 계해월(癸亥月:10월) 경술일(庚戌日:20일)에 졸하니 향년(享年) 66세이다. 동년 을축월(乙丑月:12월) 정유일(丁酉日:7일)에 장사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의(文義)이다.
첫째 부인(夫人)은 첨의평리(僉議評理) 김희(金禧)의 딸로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고 둘째 부인은 순군 만호(巡軍萬戶) 유(유)의 딸로 강녕군부인(江寧郡夫人)으로 봉작되었다.
아들은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 이광기(李光起)와 흥위위 낭장(興威衛郎將) 이광익(李光翊), 전의시 주부(典儀寺注簿) 이사걸(李俟傑), 이상원(李上元), 이삼보(李三寶)이고 딸은 각각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이■년,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言羽),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 승지 봉문(奉文), 지평 박번(朴蕃) 고려종실 서성군 왕로(王盧)에게 출가하였다.
묘지명(墓誌銘)은 최해(崔瀣)가 찬(撰)하였다.
[참고문헌] 이언충 묘지명(李彦충墓誌銘), 고려사(高麗史), 졸고천백(拙藁千百), 동문선(東文選), 登科錄
==========================================================================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충)의 묘지명(墓誌銘)
전의이씨 9세손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충:1273.5.4生∼1338.10.20卒)의 묘지(墓誌)를 옮겨 적어봅니다. 이언충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대원 고려국 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이공묘지
大元 高麗國 故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李公墓誌
칙수 장사랑 전 요양로 개주판관 최해 찬
勅授 將仕郞 前 遼陽路 盖州判官 崔瀣 撰
사람은 음(陰)과 양(陽)의 정기를 타고 났으니, 나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이요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그 사이에 곤궁하고 영달하며, 얻고 잃으며, 길고 짧고, 더디고 빠른 것이 또한 각각 그 타고 나는데서 오는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치만 알고서 수련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초목과 함께 썩고 말아 영영 알려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하늘과 땅 사이에 참여하고 만물 중에 신묘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옛날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은 덕이 아니면 공으로, 마치 큰 산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나 사람은 겉으로 작게 일어나는 것을 안다.
그 은덕이 사해에 두루 입혀지는 것을 덕이라 하고, 일과 기회가 모이는 곳과 우뢰와 바람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사직(社稷)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공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몸은 가도 도는 더욱 나타나며 일은 멀어져도 이름은 더욱 빛나게 되어, 천년 뒤에라도 일월(日月)과 함께 그 빛을 함께 다툴 것이니, 어찌 그 평소의 출처(出處)가 험하고 쉬운 것을 가지고 의논할 수 있겠는가?
나는 늙었으므로 겪은 일도 많다. 방금 보면 불꽃처럼 일어나고 햇빛처럼 밝아서 사랑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가도, 일찍이 발길을 돌리지 않아 그만 없어져서 그가 행한 업적이 있음을 묻는데는 이르지 못하니 모두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저 삼한재상(三韓宰相) 이공 같은 분은 본래 온 나라에서 칭찬하고 높이는 바 되었으며, 나도 일찍이 그 뒤를 따랐으니 무슨 수고라도 하여야 할 터인데, 그 아들이 무덤길의 글을 청하니 어찌 감히 자중만 하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이 처음 벼슬한 것은 충렬왕(忠烈王) 때인데, 태위왕[太尉王, 충선왕(忠宣王)]이 이미 데려다가 속관(屬官)으로 삼았으며 인하여 오랫동안 모시는 수고를 맡기고 벼슬도 높아졌다.
지금 왕과 인연을 맺어 알게 되면서는 특별히 정부(政府)에 두어 문학하는 관원으로 대접하고, 더불어 다스리는 도리를 의논하였으며, 전(前) 왕을 다시 만나서도 그 소임을 그대로 하였다. 모두 네 임금을 섬겼는데 그때마다 총애를 받아 전일과 다름이 없었으니, 자신의 문장[詞章]이나 풍류(風流)가 임금을 움직임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가 있을 것인가?
공의 휘는 언충(彦충)이요 자는 입지(立之)이다. 선대는 청주(淸州)의 전의현(全義縣) 사람이다. 국가 근세의 명재상인 휘 혼(混), 시호 문장공(文莊公)의 조카[猶子]이며, 고(故)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휘(諱) 천(仟)과 고(故) 직문한서 증 대사성(直文翰書贈大司成) 휘 자원(子원)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 되며, 고(故)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딸로 봉작이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은 공의 어머니이다.
공(公)은 임진(壬辰:1292)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또 갑오(甲午:1294)년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관(內侍官)인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로 들어간 후 여러번 전임하여 군부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 대사성(正獻大夫大司成)·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지제교(知製敎)· 통헌대부 검교 선부전서(通憲大夫檢校選部典書)· 행 전의령(行典儀令)· 겸사헌부집의(兼司憲執義)· 제점전부사사(提點典부司事)·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 행 1)평■부윤(行平■府尹)· 경상도 진변(慶尙道鎭邊) 행 2)■주목사(行■州牧使)를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 개성부윤(開城府尹)· 좌상시((左常侍)· 판선공시(判繕工寺)· 밀직부사( 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 광정대부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가 되었으니 이것이 공이 평생동안 역임한 관직이다.
김씨(金氏) 봉작 화평군(化平郡) 고(故) 첨의평리(僉議評理) 희(禧)의 딸과, 홍씨(洪氏) 봉작 강녕군(江寧郡) 현재 왕경(王京) 등에서 순군 만호(巡軍萬戶)인 유(유)의 딸은 공의 두 부인인데 김씨가 먼저고 홍씨가 뒤를 이었다.
전(前)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 광기(光起)와 전(前) 흥위위 낭장(興威衛郎將) 광익(光翊), 전(前) 전의시 주부(典儀寺注簿) 사걸(俟傑)과 지금 성동(成童)이 된 상원(上元), 겨우 열살인 삼보(三寶)는 모두 공의 아들이다. 현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3)이■년, 전(前)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言羽),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는 공의 사위(壻)이다. 또 세 딸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계유(癸酉:1273)년 정사월(丁巳月) 을묘일(乙卯日)은 공이 태어난 날이고, 무인(戊寅:1338)년 계해월(癸亥月:10월) 경술일(庚戌日:20일)에 공이 돌아가셨는데, 이해 을축월(乙丑月:12월) 정유일(丁酉日:7일)에 장사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군자(君子)가 가시지 않았을 때
신기(神氣)도 양양(揚揚)하신 것이
복록(福祿) 더욱 창성할 줄 믿었는데
어쩌다 군자 벌써 가셨는고
하늘을 원망해 무엇하리
참으로 인생은 무상한 것이네.
궁금한 것이 있어 확인을 부탁 드립니다.
김유선(金惟銑)의 사위 이자원(李子원), 김유예(金惟銳)의 사위 이혼(李混)이라는 인물이 있는지의 여부와 안동김문의 보첩에서의 그 내용들을 알고 싶습니다.
김유선(金惟銑)과 김유예(金惟銳)은 고려시대 인물입니다.
이자원의 아들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충)입니다. 이언충과 이혼에 대한 약력은 아래에 기록합니다.
==========================================================================
●이혼(李混) 1252(고종 39) ∼ 1312(충선왕 4). 8. 11
고려의 문신(文臣).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거화(去華)·태초(太初), 호는 몽암(蒙菴).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이천(李仟)의 아들이다.
1268년(원종 9)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참군(廣州參軍)이 되었고, 뒤이어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첨의사인(僉議舍人)을 거쳐 1287년(충렬왕 13) 12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1289년(충렬왕 15) 10월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1년(충렬왕 17) 12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문한학사 승지(文翰學士承旨)를 겸임하였다. 1293년(충렬왕 19) 12월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1295년(충렬왕 21) 1월 동지 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6년(충렬왕 22) 도당(都堂)에서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주모자로 혐의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파직 당하였다.
1297년(충렬왕 23) 12월 지 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兼) 세자 원빈(世子元賓)이 되고, 1298년 5월 검교 사공 서경 유수 평양 부윤(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에 임명되었으며 7월에 밀직사사 전조 판서 집현전 대학사 수국사(密直司使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가 되었다.
1299년(충렬왕 25) 5월 파직 당하였으며, 1303년(충렬왕 29) 7월 원나라에서 황제 명령을 받고 단사관(斷事官) 첩목아 불화(帖木兒不花), 한림(翰林) 이 학사(李學士)가 파견되어 왔을 때, 원충갑이 오잠(吳潛:초명은 吳祁)의 폐행 문제의 죄상을 일일이 지적한 글을 만들어서 첩목아 불화와 이학사에게 고발하자, 이에 홍자번(洪子藩) 등과 같이 연명으로 오기(吳祁:吳潛으로 개명)의 죄를 일일이 지적한 글을 첩목아 불화와 이학사에게 보내어 고발하였다.
1303년(충렬왕 29) 11월 지 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고, 1304년(충렬왕 30) 1월 판 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으며 6월에 《입학송(入學頌)》을 지었다.
1307년(충렬왕 33) 3월 도첨의 찬성사 판 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올랐다. 11월에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가서 그곳에 있던 충선왕과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밀직(密直), 중방(重房), 내시(內侍) 등 삼관(三官), 오군(五軍)을 모두 폐지하는 내용의 문건들을 가지고 1308년(충렬왕 34) 5월 돌아 왔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대사백(大詞伯)으로 임명되고 벽상삼한(壁上三韓)이 더해졌다.
얼마 안 되어 위위윤(尉衛尹)으로 치사(致仕)한 김양감(金良鑑)의 딸이며, 김문연(金文衍)의 여동생인 숙비(淑妃:淑昌院妃金氏)의 무함으로 회주목사(淮州牧使:淮陽)로 내려 갔다가 다시 예주 목사(禮州牧使)로 내려 갔다. 그 후에 소환되어 첨의정승(僉議政丞)이 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성질이 너그럽고 인정이 있었으나 오래 동안 전선(銓選:人事權)을 맡아 청백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손님을 좋아 하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겨 남쪽성 밖에 복산장(福山莊)이라는 별장을 지어 자주 왕래하였다.
시와 문장은 청아하고 간결하였으며 장단구(長短句) 약간 편이 세상에 전하며,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영해(寧海)로 적환(謫宦;죄과를 범하고 원방에 강직된 것)할 시기에 지은 〈무고 舞鼓〉가 《악부 樂府》에 전한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登科錄
●이언충(李彦 ) 1273.5.4生 ∼ 1338.10.20卒
고려의 문신(文臣).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입지(立之).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이천(李仟)의 손자이며 직문한서 증 대사성(直文翰書贈大司成) 이자원(李子원)의 아들로 문장공(文莊公) 이혼(混)의 조카[猶子]이다.
어머니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다.
1273년(고려 원종 14) 정사월(丁巳月) 을묘일(乙卯日)에 태어났다. 1292년(충렬왕 18) 임진(壬辰)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1294년(충렬왕 20) 갑오(甲午)년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관(內侍官)인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다. 여러번 전임하여 군부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 대사성(正獻大夫大司成)·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지제교(知製敎)· 통헌대부 검교 선부전서(通憲大夫檢校選部典書)· 행 전의령(行典儀令)· 겸사헌부집의(兼司憲執義)· 제점전부사사(提點典부司事)·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 행 평■부윤(行平■府尹)· 경상도 진변(慶尙道鎭邊) 행 ■주목사(行■州牧使)를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 개성부윤(開城府尹)· 좌상시((左常侍)· 판선공시(判繕工寺)· 밀직부사( 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 광정대부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1338년(충숙왕 06) 무인년 계해월(癸亥月:10월) 경술일(庚戌日:20일)에 졸하니 향년(享年) 66세이다. 동년 을축월(乙丑月:12월) 정유일(丁酉日:7일)에 장사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의(文義)이다.
첫째 부인(夫人)은 첨의평리(僉議評理) 김희(金禧)의 딸로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고 둘째 부인은 순군 만호(巡軍萬戶) 유(유)의 딸로 강녕군부인(江寧郡夫人)으로 봉작되었다.
아들은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 이광기(李光起)와 흥위위 낭장(興威衛郎將) 이광익(李光翊), 전의시 주부(典儀寺注簿) 이사걸(李俟傑), 이상원(李上元), 이삼보(李三寶)이고 딸은 각각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이■년,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言羽),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 승지 봉문(奉文), 지평 박번(朴蕃) 고려종실 서성군 왕로(王盧)에게 출가하였다.
묘지명(墓誌銘)은 최해(崔瀣)가 찬(撰)하였다.
[참고문헌] 이언충 묘지명(李彦충墓誌銘), 고려사(高麗史), 졸고천백(拙藁千百), 동문선(東文選), 登科錄
==========================================================================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충)의 묘지명(墓誌銘)
전의이씨 9세손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충:1273.5.4生∼1338.10.20卒)의 묘지(墓誌)를 옮겨 적어봅니다. 이언충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대원 고려국 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이공묘지
大元 高麗國 故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李公墓誌
칙수 장사랑 전 요양로 개주판관 최해 찬
勅授 將仕郞 前 遼陽路 盖州判官 崔瀣 撰
사람은 음(陰)과 양(陽)의 정기를 타고 났으니, 나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이요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그 사이에 곤궁하고 영달하며, 얻고 잃으며, 길고 짧고, 더디고 빠른 것이 또한 각각 그 타고 나는데서 오는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치만 알고서 수련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초목과 함께 썩고 말아 영영 알려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하늘과 땅 사이에 참여하고 만물 중에 신묘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옛날에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은 덕이 아니면 공으로, 마치 큰 산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나 사람은 겉으로 작게 일어나는 것을 안다.
그 은덕이 사해에 두루 입혀지는 것을 덕이라 하고, 일과 기회가 모이는 곳과 우뢰와 바람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사직(社稷)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공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몸은 가도 도는 더욱 나타나며 일은 멀어져도 이름은 더욱 빛나게 되어, 천년 뒤에라도 일월(日月)과 함께 그 빛을 함께 다툴 것이니, 어찌 그 평소의 출처(出處)가 험하고 쉬운 것을 가지고 의논할 수 있겠는가?
나는 늙었으므로 겪은 일도 많다. 방금 보면 불꽃처럼 일어나고 햇빛처럼 밝아서 사랑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가도, 일찍이 발길을 돌리지 않아 그만 없어져서 그가 행한 업적이 있음을 묻는데는 이르지 못하니 모두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저 삼한재상(三韓宰相) 이공 같은 분은 본래 온 나라에서 칭찬하고 높이는 바 되었으며, 나도 일찍이 그 뒤를 따랐으니 무슨 수고라도 하여야 할 터인데, 그 아들이 무덤길의 글을 청하니 어찌 감히 자중만 하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공이 처음 벼슬한 것은 충렬왕(忠烈王) 때인데, 태위왕[太尉王, 충선왕(忠宣王)]이 이미 데려다가 속관(屬官)으로 삼았으며 인하여 오랫동안 모시는 수고를 맡기고 벼슬도 높아졌다.
지금 왕과 인연을 맺어 알게 되면서는 특별히 정부(政府)에 두어 문학하는 관원으로 대접하고, 더불어 다스리는 도리를 의논하였으며, 전(前) 왕을 다시 만나서도 그 소임을 그대로 하였다. 모두 네 임금을 섬겼는데 그때마다 총애를 받아 전일과 다름이 없었으니, 자신의 문장[詞章]이나 풍류(風流)가 임금을 움직임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가 있을 것인가?
공의 휘는 언충(彦충)이요 자는 입지(立之)이다. 선대는 청주(淸州)의 전의현(全義縣) 사람이다. 국가 근세의 명재상인 휘 혼(混), 시호 문장공(文莊公)의 조카[猶子]이며, 고(故)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휘(諱) 천(仟)과 고(故) 직문한서 증 대사성(直文翰書贈大司成) 휘 자원(子원)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 되며, 고(故)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김유선(金惟銑)의 딸로 봉작이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은 공의 어머니이다.
공(公)은 임진(壬辰:1292)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또 갑오(甲午:1294)년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관(內侍官)인 흥신궁 녹사(興信宮錄事)로 들어간 후 여러번 전임하여 군부좌랑(軍簿佐郞)· 정헌대부 대사성(正獻大夫大司成)·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지제교(知製敎)· 통헌대부 검교 선부전서(通憲大夫檢校選部典書)· 행 전의령(行典儀令)· 겸사헌부집의(兼司憲執義)· 제점전부사사(提點典부司事)·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 행 1)평■부윤(行平■府尹)· 경상도 진변(慶尙道鎭邊) 행 2)■주목사(行■州牧使)를 지냈으며, 내직(內職)으로 옮겨 개성부윤(開城府尹)· 좌상시((左常侍)· 판선공시(判繕工寺)· 밀직부사( 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 광정대부 정당문학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가 되었으니 이것이 공이 평생동안 역임한 관직이다.
김씨(金氏) 봉작 화평군(化平郡) 고(故) 첨의평리(僉議評理) 희(禧)의 딸과, 홍씨(洪氏) 봉작 강녕군(江寧郡) 현재 왕경(王京) 등에서 순군 만호(巡軍萬戶)인 유(유)의 딸은 공의 두 부인인데 김씨가 먼저고 홍씨가 뒤를 이었다.
전(前)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 광기(光起)와 전(前) 흥위위 낭장(興威衛郎將) 광익(光翊), 전(前) 전의시 주부(典儀寺注簿) 사걸(俟傑)과 지금 성동(成童)이 된 상원(上元), 겨우 열살인 삼보(三寶)는 모두 공의 아들이다. 현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민상정(閔祥正),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3)이■년, 전(前) 비순위 별장(備巡衛別將) 원후(元言羽), 창릉직(昌陵直) 윤희보(尹希甫)는 공의 사위(壻)이다. 또 세 딸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계유(癸酉:1273)년 정사월(丁巳月) 을묘일(乙卯日)은 공이 태어난 날이고, 무인(戊寅:1338)년 계해월(癸亥月:10월) 경술일(庚戌日:20일)에 공이 돌아가셨는데, 이해 을축월(乙丑月:12월) 정유일(丁酉日:7일)에 장사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군자(君子)가 가시지 않았을 때
신기(神氣)도 양양(揚揚)하신 것이
복록(福祿) 더욱 창성할 줄 믿었는데
어쩌다 군자 벌써 가셨는고
하늘을 원망해 무엇하리
참으로 인생은 무상한 것이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