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15---충렬공 3남 문영공 1남 김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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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4 08:40 조회1,729회 댓글0건본문
■ 안동김씨 홈
●김영돈(金永暾)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고려사, 안동김씨 족보(1580, 경진보)에는 김영돈(金永旽) 이라 기록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사사(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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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문숙(文肅)이고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栢田)에 설단(設壇)했다.
■ 문영공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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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는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贈諡 文敬公) 휘(諱) 허공(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영돈(永暾)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
■ 김문영공 부인 허씨 묘지명 (1332년 이제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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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永暾은 봉상시부 전법총랑이요,
■ 안동김씨 족보 (1580년 경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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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순(恂) 자 귀후 향년64 등제 중대광 판삼사사 상락군 시문영 충렬공 정일본 공잠등주이종 성관후 공예서 만축성기일이?위락 사견여사 부인 양천허씨
---여 백이정(白이正) 宰臣에 출가
---여 별리불화(別里不花) 무후에 출가
---여 정책(鄭책) 청하군에 출가
---자 영돈(永旽) 小字 나해(那海)
---자 영휘(永暉) 宰臣
---자 사순(思順) 삭발 宗慈
---자 영후(永煦)
■ 문영공 묘지명 (1321.10.14, 민지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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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永暾)의 문중(門中)에서 이미 장지를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는 그의 선친(=순)의 친구인지라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銘)을 쓰노라.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 김영돈 묘지명 (1348.8, 안진 찬)
김영돈 묘지명은 조선순조8년 (1808, 술진)에 발견되었는데 탈락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현재 족보에 수록된 명문 가운데에도 오식 혹은 탈자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원 고려국(有元 高麗國1>)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2>)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왕(王)이 중세에 혼인하였기 때문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부(府)는 지금의 복주목(福州牧)이다. 13대손인 판도첨의사사 □□□□ 방경(方慶3>)이 상국(上國, 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 관군을 도와 수전(水戰)에 공이 있었으므로, 천자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을 제수하였다. □□□□□ 막내인 순(恂4>)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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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합주사8>로 나갔는데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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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되어 이공수(李公遂)등 12명을 뽑았는데10>, 그 금□가 엄숙하니 사림(士林)들이 칭찬하여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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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13>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무자년(충목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어머니는 양천14>허씨로 도첨의중찬 공(珙)15>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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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신씨(申氏)는 판도사랑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에 봉해졌으며,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 오원경(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진(縝)은 장복직강인데 우대헌 유보발(柳甫發)16>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안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늘 얻었는데 장차 □업(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안진)가 이미 공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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