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18---충렬공 義男 한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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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4 08:45 조회1,534회 댓글0건본문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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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년)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1278년)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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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韓希愈)
?∼1306(충렬왕 32). 고려의 권신. 가주(嘉州)출신.
원래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의 아전이었다. 군졸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하였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도 대단하여,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하여 대장군이 된 그에게는 모함의 사건도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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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하여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같은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도62干) 및 나만알대왕(那蠻#알09大王)을 보내어 구원한 적이 있었으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적진이 놀라 무너져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베어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다니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적군 580여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소환하여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다시 1291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흔05)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하여 불법한 일을 꾀한다고 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활03#활03不花)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호송되었다.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하여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고,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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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金흔)
1251(고종 38)∼1309(충선왕 1). 고려시대의 무신.
아버지는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방경(方慶)이다. 음서(蔭敍)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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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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