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122---충렬공 묘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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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5 09:22 조회1,798회 댓글0건본문
■ 한강집 (정구 저)
외선조(外先祖) 김 충렬공(金 忠烈公)의 무덤에 제문
삼가 고합니다. 부군(府君)의 위대하고 거룩한 공은 역사에 빛나서 우리나라의 후세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흠모하는데, 더구나 부군의 외손인 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은 부군의 손녀(=충렬공 3자 문영공 김순의 큰 딸)로서 우리 청하군 부군(淸河君府君 ★정책(鄭責)에게 시집와서 설헌(雪軒 ★정오(鄭오)과 설곡(雪谷 ★정포(鄭言+甫)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 두 선생은 문장이며 기풍과 절개가 백대를 풍미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곡선생의 후손으로 마침 안동부사로 재직(1607년)하면서 부군의 봉분을 찾아 참배 함으로써 평소에 흠모하는 정성을 바치려고 생각 하였으나 그 소원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정사신(鄭士信)은 설곡 선생의 후손으로 대대로 본 고을에서 살아온 자인데, 지금 그를 보내 대신 제물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진정 조상의 한 기운을 나눠 받아 피차간의 차이는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제가 몸소 참여하지 못하기에 마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처럼 유감 스럽습니다. 선영을 멀리 우러러볼 제슬픈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이 정성을 굽어살펴 강림 하소서.
■ 국역 영가지
부사(府使) 정구(鄭逑) - 품계는 가선(嘉善)이다. 만력(萬曆) 정미(1607년) 부임하여 같은 해 사임으로 교체되었다.
- <국역 영가지> 399쪽
■ 국역 영가지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轉)하기를 이는 충렬공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 <국역 영가지> 56쪽
■ 안동시청 홈
청주정씨
'영가지'에 의하면 청주정씨가 안동에 살기는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진 ★정오와 우간의대부를 지낸 그 아우 ★정보 형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정책이 궁궐도감으로,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왕(충숙 왕)을 도운 공으로 청하군에 봉해지고 판도판서를 역임했는데, 이는 ★김방경의 아들인 상락군 ★김순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한 설헌 정오, 설곡 정보은 바로 이의 아들이다. ★설헌은 문과급제로 공민왕의 사부, 첨의평리를 지내고, 그 아우 ★설곡은 진사, 문과로 충혜왕때 우간의대부를 지냈다.
'영가지' 방리편 회곡촌조에 '마을 어귀에 남향으로 된 큰 밭이 있으니, 예로부터 전하기를 ★충렬공이 여기서 살았는데, 설헌과 설곡형제도 외가로하여, 와서 살다'라고 했음을 보아, 설헌 형제가 이곳 회곡에 입향하게 되기는 그 외가의 반연이었음을 알수 있다.
■ 디지털한국학
★정구(鄭逑)
시대 조선 생몰년 1543-1620(중종38-광해군12)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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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디지털한국학
★정사신(鄭士信)
1558(명종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 또는 신곡(神谷).
두(枓)의 아들이며, 현감 사성(士誠)의 아우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저작·박사·감찰·정언·예안현감·병조정랑·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전적·예조정랑·수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서 왕을 따라 평양으로 피난중 반송정(盤松亭)에서 이탈하였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뒤 강원도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 1595년 선산군수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계변무(璿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원종(光國原從)의 훈(勳)에 책록되고, 장례원판결사·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에 이르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매창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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