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26---충렬공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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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6 08:52 조회1,619회 댓글0건본문
조선초기 <고려사>를 편찬할 때 '김방경 열전'의 중요한 근거자료는 <충렬공 행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충렬공 행장>과 <고려사 김방경 열전>을 비교해 보면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충렬공 행장 간행과정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300년 충렬공께서 돌아가시고
1)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렬공 행장이 만들어졌고
2) 1350년 2월, 충렬공 행장에 안진(安震)이 끝에 적기를(跋),
충렬공의 손자 김영후(金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썼다
3) 1421년 10월, 최개(崔開)가 말편(末篇)에 기록하기를,
상락공(上洛公) 5대손 김명리(金明理)가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고 최개를 찾아가 부탁하였고, 최개는 한종우(韓宗祐)와 더불어 정이오(鄭以吾)에게 부탁하여 정이오가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고, 한군(韓君)이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였다
4) 후손 김구정(金九鼎)이 삼가 기록하기를(謹識),
또한 책이 있으니 김덕룡(金德龍)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 충렬공 행장
---생략---
충렬공(忠烈公)의 특수(特殊)한 공로(功勞)와 특이(特異)한 업적(業績)은 해와 별처럼 밝게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옛 사람의 공로(功勞)와 업적(業績)이 저와 같으나 그의 자손(子孫)들에 와서 능히 계승하지 못하고 묻혀 버려서 세상에 듣기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공(公)의 손자(孫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推誠輔理同德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福昌府院君=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根本)을 잊지 않게 했음이 대개 이와 같고 또한 자손(子孫)들에게 가히 공(公)의 남기신 기풍(氣風)과 공적(功績)이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나서 백세(百世)을 두고 쇠(衰)하지 않을 줄 아노라.
지정 십년 경인(至正 十年 庚寅=忠烈王 2年=1350年) 2月
광정대부 검교 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 안진
匡靖大夫 檢校 都僉議參理 禮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安震)이 끝이 적음(跋)
또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 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아드님)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코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쳐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하고 하였다. 나는 다행(多幸)이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여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_)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 )함은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 말편(末篇)에 기록함
■ 김영후(金永煦) *충렬공의 손자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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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안진(安震) *1348년 충렬공의 손자 김영돈 묘지명을 찬하고, 1350년 충렬공 행장 발문을 지었다.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예문검열(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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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동(銅)을 바치게 하였다.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 김명리(金明理) *척약재 김구용의 둘째아들. 선친의 유고 척약재학음집을 간행하였다.
1361.공민왕 10 -- 1438.세종 20
15세에 진사급제하고, 부친(척약재 휘 구용)께서 명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갔다가 귀양길에 돌아가시자 슬픈 상중에서도 생원과에 급제함. 그 후 낭장, 중랑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 진양대도호부 판관, 옥주군사. 경창부 소윤. 성천도호부사 등을 거침. 만년에 경기도 광주의 탄곡리에 퇴거하여 사심.
■ 최개(崔開)
■ 한종우(韓宗祐)
■ 정이오(鄭以吾)
1347(충목왕 3)∼1434(세종 1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신중(臣重)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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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교은집》·《화약고기 火藥庫記》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 김덕룡(金德龍) *충렬공 후손.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
1518(중종 13)∼?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운보(雲甫), 호는 낙곡(駱谷). 해(瀣)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 봉상시주부·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57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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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곧 복직되어 평안도관찰사·개성유수 등을 거쳐 1571년(선조 4) 대사헌이 되었다. 평소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엄명으로 다스려 간활(姦猾)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 김구정(金九鼎) *충렬공 후손, 전서공 김성목의 후손. 강화부사 김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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