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34---물계서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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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8 12:06 조회1,499회 댓글0건본문
■ 안렴사공파세보 (1988 무진보)
●물계서원 향사록 (在안동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물계서원은 이조현종2년 (1661년 辛丑)에 학사 김공 응조의 건의로 건립하였으나, 1868년 戊辰 9월에 대원군의 미사액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향되었음
--첨의중찬 상락군 충렬공 김방경 주벽
--대사성 척약재 김구용
--공조참판 청백리 허백당 김양진
--부제학 학사 김응조
●물계서원 이건봉안문 (대사간 목재 홍여하(1621-1678) 製)
花山 높고 푸르르며 낙동강 물 맑게 흘러
지령 길러 정기 모아 신선에서 하강하니 壇宇도 넓고 넓다.
세상에 드문 재주 文武를 겸비하니
때마침 태어나사 몸바쳐 보국할 제
곧은 기풍 충천하고 엄숙 강기 떨쳤도다
총마 어사 나가실 제 竹節같이 곧은 충성
신명도 감동하고 만백(=오랑캐)도 순종하다
정의 세워 역적토벌 괴수 잡아 목을 베니
인륜 좋은 동국 땅에 어진 장상 위풍 밝혀
동해로 軍旅떨쳐 파도가 조용하고
생령은 덕을 입고 사직은 혈기 찾아 미관 피발 본받으니
태산 북두 높은 명성 우주를 덮은 공적
사후 俎豆(조두) 마땅하고 鄕邦(향방)이 추모하니
盛事에 운수 있어 5백년 지낸 후에
부용산 기슭에 엄연한 精舍 있어
맑은 사당 5架로다. 거북점 이미 치고
좋은 날 선택하고 어진 선비 모여드니
공중에 도는 향연 휘황하게 밝은 촛불
彷佛하신 그 영풍은 천만세를 두고 두고
나의 초예 흠향하고 후생들을 도우소서
생각건대 勿溪서원은 옛날 감천현 서북 20리 勿閑村에 있었는데
학사 김공 응조의 건의로 사당을 세워서 충렬공을 봉향하다가
경술년에 와서 학사를 또 배향하였다.
정축년에는 일도의 선비들이 "서원으로서 현의 한 구석에 있고
基址가 온당치 못해서 영원한 봉안에 험이 있다." 하여
드디어 발의하고 현의 서쪽 3리 가량 되는 고방산 및 泉田리로 이건하니
천전은 곧 지금의 안동부내 감동 물한촌이며
현재의 경북 예천군 감천면이다.
木齋先生文集卷之七
祭文
勿溪書院祔金鶴沙時告上洛公文 124_455c
人仰盛德。無間古今。維鶴沙公。寓慕偏深。同堂腏食。爰協衆心。恭伸虔告。冀垂顧歆。
목재집(木齋集)
권수제 木齋先生文集
판심제 木齋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연도 英ㆍ正祖年間刊
권책 12권 6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1.9×16.1(㎝)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811.98-홍여하-목-판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24
성명 홍여하(洪汝河)
생년 1620년(광해군 12)
몰년 1674년(현종 15)
자 百源, 應圖
호 山澤齋, 木齋, 大朴山人
본관 缶溪
특기사항 -
저자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李玄逸이 지은 行狀과 權愈가 지은 묘갈명에 의하면, 「四書發凡口訣」, 「周易口訣」, 「儀禮考證」, 「彙纂麗史」, 「東史提綱」, 「庸學口義」와 文集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遺文과 遺跡의 정리는 저자가 졸한 지 3년이 되는 1677년(숙종 3)경부터 이루어졌다. 이해에 저자의 아들 洪相文, 洪相民은 李玄逸에게 행장을 부탁하였고, 이현일은 저자의 門人 金宇泰가 편집한 言行錄을 바탕으로 행장을 지었다. 이현일은 이 언행록 가운데 저자의 평소 언행 및 출처 내역 등은 따로 語錄으로 만들어 문집의 雜著 뒤에 편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는데, (與洪眞卿相文天卿相民昆季, 葛庵集 卷11) 그의 견해가 본집에는 반영되지는 않았으나 李玄逸이 본집의 편차에 일정한 조언과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689년 己巳換局으로 南人이 집권하면서 저자는 곧 李玄逸의 진달로 副提學에 추증되었고, 1693년에는 尙州 近嵒書院에 종향되었으며, 또한 同年에 權愈가 序文을 짓기도 하였으니, 이즈음 문집의 간행을 준비하여 어느 정도 편차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肅宗代에는 문집이 간행되지 못한 듯하다.
■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 /편집인 김재희(金在熙) /1996. 8.30
▣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척약재(?若齋)를 봉안(奉安)하는 글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 주1)가 짓다.--
상락(上洛)의 종손(宗孫)이요, 목은(牧隱)의 의발(衣鉢 : 가사(袈裟)와 바리때, 전법(傳法)의 표가 되는 물건, 스승으로부터 법통(法統)을 전수받았음을 의미함)을 받았으며, 포은(圃隱)·도은(陶隱)과 더불어 연마하였네. 佛을 배척하여 멀리하고 실질학문에 노닐었으며, 예문(藝文)에서 붓을 잡았는데 성가(聲價)는 일찍이 무성하였네.
진사(進士)에 선발되매 앞에서는 다툴만한 이가 없었고, 성균(成均)의 자리에 오르니 아름답고 성(盛)한 적전(嫡傳)이었네.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若] 둘이 아니었고(변함이 없었고) 소칠(小七 : 일곱에서 하나 부족하니 여섯이란 뜻)과 벗을 하였네.
뜻하지 않은 데에서 재앙(災殃)이 죄가 아닌데 귀양을 갔네. 까마득하도다 서토(西土)여, 베돛[布帆]의 그림자가 끊어졌네. 강(江)과 산(山)에 얼굴이 파리해지고 바람[風]과 달[月]에 혼(魂)이 스러지네. 강문참(江門站 : ☞번역본의 강문점은 오기임) 의 소식은 천고(千古)에 절통한 일인데, 의리가 무거워 몸을 내어 던졌고, 명(命)을 받고 죽을 곳을 얻었네.
외형(外形)은 엄숙하고 마음은 씩씩하며 명성(名聲)은 중국에 까지 알려졌네. 철없는 아녀자가 어찌 득실(得失)을 알겠는가?
이 마을은 태백(太白)을 뒤로하고 물계(勿溪)를 앞에 둘렀네. 이에 사전(祀典)을 올리고 충렬(忠烈)을 경건히 걸었네. 공(公)의 사손(嗣孫)에게 본이 되었는데 알맞은 의식(儀式)을 어찌 거는건가. 나라의 계획은 이미 진실하고, 제물(祭物)도 정결하니 널리 구하는데에 응하여 흠향(歆饗)하소서.
▣ 상향축문(常享祝文) ▣
--크게 전대(前代)의 공업(功業)을 이었고, 일찍이 도(道)있는데에 나아갔네. 명을 받고 몸을 바치니 아름다운 이름 길이 보존되었네.
--또(又)곤경(困境)에 처하여도 오히려 곧았고 태평한 때를 맞아 치적(治績)이 드러났네. 혜택은 고향에 미치고 물려준 향기 스러지지 않네.
▣ 고유문(告由文) ▣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 주2)이 짓다.--
--생각하면 척약재(?若齋)·허백당(許白堂) 양선생의 바른 학문과 높은 행의(行義)는 한 때 익히 알려져 백세토록 조두(俎豆)의 향사(享祀)가 있어 마땅하고 분필(芬苾 : 제사)을 올리는 사당이 있어야 합당하다. 그러나 미처 성대한 의식을 올리지 못하여 공의(公議)가 오래도록 침울하였다. 이에 한 도(道)의 사림(士林)은 본원(本院)이 곧 두 선생의 영(靈)이 편안한 곳으로서 이에 함께 배향(配享)하기로 모여 논의하였다.
대체로 아름다움을 드날리매 빛은 더욱 나타나고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매 도(道)가 아울러 높아진다. 할아비는 손자로 하여 높아지고 손자는 할아비로 하여 겸손해 진다. 인정(人情)도 뜻에 맞고 신리(神理)도 편안하네. 감히 제사를 올림에 있어 이에 거듭 경건(敬虔)히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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