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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장군들의 흉상<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최영(崔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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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실 작성일04-08-28 13:45 조회1,4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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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상 : 강감찬(姜邯贊) ▣

○ 유물명칭 : 흉상 강감찬(姜邯贊)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고려(高麗)
○ 재      질 :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 용도기능 : 기타(其他) / 기타(其他)
○ 참고문헌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 법인/사립(法人/私立) / 전쟁기념(전쟁기념)
○ 유물번호 : 1993(1993) 102005

http://210.90.43.5//museum/image/f93//F93102005.JPG

<정의> 고려초기의 문신이며 장군

<발달과정/역사>
  고려 초기의 장군인 강감찬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강감찬(948 - 1031)은 본관이 금천(衿川)이며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948년 금주(지금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났다. 983년 강감찬은 과거에서 갑과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 1010년에는 거란의 침공으로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갔을 때 호종(扈從)하였다. 1019년에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을 때에 총사령관격인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1019년 귀주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비바람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거란군에 맹공격을 가해 전세를 장악하고 추격전을 벌여 거란군을 섬멸시켰다. 1030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제원>  흉상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 흉상 : 서희(徐熙) ▣

○ 유물명칭 : 흉상 서희(徐熙)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고려(高麗)
○ 재      질 :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 용도기능 : 기타(其他) / 기타(其他)
○ 참고문헌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 법인/사립(法人/私立) / 전쟁기념(전쟁기념)
○ 유물번호 : 1993(1993) 102007

http://210.90.43.5//museum/image/f93//F93102007.JPG

<정의> 고려 초기의 정치?외교가이며 장군

<발달과정/역사>
  고려 초기의 장군인 서희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서희(942 - 998)의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자는 염윤(廉允), 시호는 장위공(章威公)이다. 960년 과거 갑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93년에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과孫寧)과 안융진(安외戎교鎭적) 담판을 벌여 침략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인식시켜 병력을 철수케 하였다.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축출하고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에 성을 쌓아 강역을 압록강 유역까지 넓혔다.

<제원> 흉상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 흉상 : 윤관(尹瓘) ▣

○ 유물명칭 : 흉상 윤관(尹瓘)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고려(高麗)
○ 재      질 :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 용도기능 : 기타(其他) / 기타(其他)
○ 참고문헌 :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 법인/사립(法人/私立) / 전쟁기념(전쟁기념)
○ 유물번호 : 1993(1993) 102006

http://210.90.43.5//museum/image/f93//F93102006.JPG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이며 장군

<발달과정/역사>
  고려 전기의 장군인 윤관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윤관(? - 1111)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경(文敬)이라 했다가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1107년에는 여진정벌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별무반(別武班)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동음성?석성 등 135여 곳에서 휘하 장수를 지휘하여 여진을 섬멸하였던 것이다. 탈환한 곳에 9성을 축조하여 영토확장과 변방 수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원> 흉상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 흉상 : 최영(崔瑩) ▣

○ 유물명칭 흉상 : 최영(崔瑩)
○ 국적/시대 한국(韓國) / 고려(高麗)
○ 재질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 용도기능 기타(其他) / 기타(其他)
○ 참고문헌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법인/사립(法人/私立) / 전쟁기념(전쟁기념)
○ 유물번호 1993(1993) 102004

http://210.90.43.5//museum/image/f93//F93102004.JPG

<정의> 고려말의 장군. 재상(宰相)

<발달과정/역사>
  고려 말기의 장군인 최영의 흉상(胸像)으로,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쟁기념관에서는 역대 전쟁?전란에 참전하여 국가를 구하였거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등 특별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귀감이 되는 호국 선열들을 선정하여 호국인물이라 하였고, 그 인물의 모습을 흉상, 초상화 등으로 제작하였다.
  최영(1316-1388)은 본관이 창원(昌原)이며 평장사(平章事) 崔惟淸)의 5세손으로서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1352년에 조일신(趙日新)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이 되었고, 1354년에는 대호군(大護軍)의 지위에 올랐다.
  1358년에는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1359년과1361년에는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후 나타난 이인임(李仁任) 정권은 최영과 함께 공민왕 이래의 외교노선인 친명책(親明策)을 버리고 친원책(親元策)으로 돌아갔는데 이를 둘러싸고 이성계?정몽주 등과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375년에는 왜구의 침략이 격화되자 홍산(鴻山)전투에 출정하여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388년 최영은 필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서경에 머물면서 전쟁을 총지휘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38,8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정벌을 위해 북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민수를 회유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오석 좌대 위에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이 설치된 형태이며, 최영의 얼굴 모습은 영정을 바탕으로 하고, 복장은 고려시대의 갑옷인 경번갑으로 표현하였다.

<제원> 흉상높이 : 90cm, 오석 좌대 높이 : 140cm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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