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장군 교서(국역 대동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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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08-30 12:52 조회2,066회 댓글0건본문
<김시민 교서>
출전 : <재조번 방지> 제2권(국역 대동야승 제 36권. 재조번방지 2권. 169P-172)
* 再造藩邦志(奎4494),
申炅(朝鮮)著. 4卷 4冊 活字本(木活字) 30.5×19.5cm. 左右雙邊 半郭:23.3×15.7cm. 有界 10行 24字. 版心:上下花紋魚尾. 跋:申以華.
* 저서소개 : 申炅(1669∼?)이 1577년(宣祖 10)부터 1607년까지의 壬辰倭亂前後 30년 동안에 걸쳐 우리나라와 明과의 관계와 明의 후원을 받은 再造의 사실을 적은 책으로, 저자의 아들 申以華가 1693년(肅宗19)에 榮川郡에서 木板本으로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字는 用晦, 號는 華隱, 본관은 平山이다. 申欽의 孫子이고 翊聖의 아들이다. 金集의 門人으로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丙子胡亂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泰安縣 白華山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經史에 능하였으며 卜術·算數에도 밝았다. 이책은 引用書目만 해도 列聖御製·攷事撮要∇閣雜記·正氣錄·象村集·西厓集·芝峯集 등 30여種에 이르고, 그 저술 방법에 있어서도 諸集 중에서 片言隻字라도 취할 것이 있으면 덧붙여 그 적확을 기하려고 애썼으며, 망령되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앞 표지에 「當于三十年甲戌閏四月日藏于史庫」라고 기재되어 있고, 표지내면에는 저자 申炅의 간단한 家統과 略歷이 소개되어 있다. 序文은 없고 앞에 인용 書目 32종이 나열되어있다.
{권1}:1577년∼1592년 6월 사이 16년간의 기사.
{권2}:1592년 6월∼1593년 9월 사이 2년간의 기사.
{권3}:1593년 10월∼1597년 사이5년간의 기사.
{권4}:1597년 9월∼1607년 사이 11년간의 기사가 실려 있고,
끝에는 아들 申以華의 跋文이 있다. 이책은 壬辰倭亂 前後의 朝鮮과 明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지만 그 저술의 기본취지가 明 神宗의 「恤小之恩」과 宣祖의 「事大之誠」을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안목으로 볼 때 그 인식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책은《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고 民族文化推進會의 國譯本도 있다.
○ 적의 한 부대가 다시 해현(海縣)을 돌아나와 진주를 포위하였다.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목천(木川) 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才略)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때 마침 성안에 있었는데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니, 김시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군중(軍中)에서 맹세하고, 감히 떠난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사민(士民)들을 수습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여 남녀를 섞어 대오를 짜고 병장기를 설치하고 깃발을 세웠는데,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몇 겹으로 포위하니 형세는 새알을 깨는 것과 같이 위태로웠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 적은 대패하여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 감히 다시 진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에 올랐는데 그 전투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서를 내려 본도의 군민(軍民)을 선유하였다.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군신(君臣)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면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영남은 신라 때부터 터전을 잡아 부로(父老)는 효제(孝弟)를 행하고 자제는 시서(詩書)를 익혔도다. 비록 난리를 겪은 뒤일지라도 어찌 분발하는 무리가 없겠는가. 중악(中岳)에서 달밤에 맹세하니 김유신(金庾信)의 칼은 절로 칼집에서 벗어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을 때는 실로 몸에 꽂힌 화살은 고슴도치와도 같았도다. 전에 왜적이 처음 닥쳐왔을 때는 이상하게 한 사람도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장신(將臣)들이 형세를 살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실로 사민(士民)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도다. 다투어 놀라 흩어지려 하니 불러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열읍은 텅 비어 한 지방이 깨졌도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재생을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도다. 내가 서쪽으로 옮겨온 뒤로 이미 남쪽에 대한 희망이 끊어졌더니, 어찌 너희들이 앞장서서 군사를 규합하고 고심하여 적을 토벌하며 의기가 하늘에 뻗치고 열사들이 호응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린 밥을 모아 양식으로 삼으니 백성을 괴롭혀 모은 쌀 창고는 텅 비었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기고의 병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출동하자 도망가는 적병이 정신을 잃었고, 무계(武溪)주D-027에서 접전했을 때는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에 찼었다. 관군은 어찌하여 번번이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하여 줄곧 승첩하는가. 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인데, 형(刑)이 시행되지 못하고, 의병이 맺어진 것은 의(義)인데 의는 물러나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그만두고 민력을 후히 기르며, 절진(節鎭)을 봉하는 일을 그만두고 군사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킬 줄을 미리 알았던들 떠다니는 혼령들이 어찌 동래(東萊) 들녘에 흩어지며, 독한 칼끝이 어찌 평양성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후회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번에 본도의 배지인(陪持人 지방 관아의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 강만혼(姜萬渾)이 돌아가는 길에 한 장의 과인의 잘못을 서술한 교서로 천리 밖의 내 마음을 전하였으나, 바다와 산을 무사히 거쳐서 진중에 선포가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에 부탁하여 나의 뜻을 설명하여 알리노니, 적정을 계속 염탐하라. 너희들이 나의 글을 볼 것이니, 나의 회포를 어이 다하랴. 성천(城川)의 이슬과 서리에 종묘사직의 쓸쓸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의주 강가에 장전(帳殿)의 소슬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조석으로 간절하도다.
천조(天朝)에서 가엾게 여겨 맹장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명 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에 산악도 빛을 띠우리라. 가을날은 맑고 길은 마르니 바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줄일 시기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江浙)에 줄지었도다. 미친 오랑캐가 죄악을 쌓았으니 천벌이 내려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의병과 열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일어났음에랴. 곳곳에서 적을 베고 날로 전과를 올리니, 실로 천지가 말없이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국가 재건의 기회로다. 바라노니 그대들이여! 더욱 정충(精忠)을 힘쓸지어다. 듣건대 김성일(金誠一)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寧海)를 지킨다 하니, 각기 좌ㆍ우도 관찰사 등의 호칭을 내리고 대소의 의병장들은 차등에 따라 관직을 내리노라. 너희들은 절제(節制)의 지시를 듣고 또한 서로 계획을 짜내서 돌아가는 적을 맞아 쳐서 그 후미를 공격하라. 적이 머물고 있는 곳을 염탐하여 병영을 야습할 것이니, 멀리서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기회를 관찰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노라. 김인갑(金仁甲)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슬퍼하여 판서를 추증하고, 이형(李亨) 등의 전사를 슬퍼하여 아들 하나에게 벼슬을 주노라. 상과 관직을 어찌 상관하며 옥과 비단을 어찌 아끼랴. 영남 지방을 먼저 숙청하고 하루 빨리 나를 맞이해 주기 바라노라. 내 말을 마치고자 하니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다.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출전 : <재조번 방지> 제2권(국역 대동야승 제 36권. 재조번방지 2권. 169P-172)
* 再造藩邦志(奎4494),
申炅(朝鮮)著. 4卷 4冊 活字本(木活字) 30.5×19.5cm. 左右雙邊 半郭:23.3×15.7cm. 有界 10行 24字. 版心:上下花紋魚尾. 跋:申以華.
* 저서소개 : 申炅(1669∼?)이 1577년(宣祖 10)부터 1607년까지의 壬辰倭亂前後 30년 동안에 걸쳐 우리나라와 明과의 관계와 明의 후원을 받은 再造의 사실을 적은 책으로, 저자의 아들 申以華가 1693년(肅宗19)에 榮川郡에서 木板本으로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字는 用晦, 號는 華隱, 본관은 平山이다. 申欽의 孫子이고 翊聖의 아들이다. 金集의 門人으로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丙子胡亂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泰安縣 白華山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經史에 능하였으며 卜術·算數에도 밝았다. 이책은 引用書目만 해도 列聖御製·攷事撮要∇閣雜記·正氣錄·象村集·西厓集·芝峯集 등 30여種에 이르고, 그 저술 방법에 있어서도 諸集 중에서 片言隻字라도 취할 것이 있으면 덧붙여 그 적확을 기하려고 애썼으며, 망령되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앞 표지에 「當于三十年甲戌閏四月日藏于史庫」라고 기재되어 있고, 표지내면에는 저자 申炅의 간단한 家統과 略歷이 소개되어 있다. 序文은 없고 앞에 인용 書目 32종이 나열되어있다.
{권1}:1577년∼1592년 6월 사이 16년간의 기사.
{권2}:1592년 6월∼1593년 9월 사이 2년간의 기사.
{권3}:1593년 10월∼1597년 사이5년간의 기사.
{권4}:1597년 9월∼1607년 사이 11년간의 기사가 실려 있고,
끝에는 아들 申以華의 跋文이 있다. 이책은 壬辰倭亂 前後의 朝鮮과 明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지만 그 저술의 기본취지가 明 神宗의 「恤小之恩」과 宣祖의 「事大之誠」을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안목으로 볼 때 그 인식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책은《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고 民族文化推進會의 國譯本도 있다.
○ 적의 한 부대가 다시 해현(海縣)을 돌아나와 진주를 포위하였다.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목천(木川) 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才略)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때 마침 성안에 있었는데 성을 굳게 지킬 계획을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을 하니, 김시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군중(軍中)에서 맹세하고, 감히 떠난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사민(士民)들을 수습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여 남녀를 섞어 대오를 짜고 병장기를 설치하고 깃발을 세웠는데,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몇 겹으로 포위하니 형세는 새알을 깨는 것과 같이 위태로웠다. 김시민은 아내와 함께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 적은 대패하여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끌고 달아나 감히 다시 진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 공으로 김시민은 진주 목사에 올랐는데 그 전투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아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교서를 내려 본도의 군민(軍民)을 선유하였다.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군신(君臣)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이는 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면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영남은 신라 때부터 터전을 잡아 부로(父老)는 효제(孝弟)를 행하고 자제는 시서(詩書)를 익혔도다. 비록 난리를 겪은 뒤일지라도 어찌 분발하는 무리가 없겠는가. 중악(中岳)에서 달밤에 맹세하니 김유신(金庾信)의 칼은 절로 칼집에서 벗어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을 때는 실로 몸에 꽂힌 화살은 고슴도치와도 같았도다. 전에 왜적이 처음 닥쳐왔을 때는 이상하게 한 사람도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장신(將臣)들이 형세를 살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실로 사민(士民)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도다. 다투어 놀라 흩어지려 하니 불러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열읍은 텅 비어 한 지방이 깨졌도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재생을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도다. 내가 서쪽으로 옮겨온 뒤로 이미 남쪽에 대한 희망이 끊어졌더니, 어찌 너희들이 앞장서서 군사를 규합하고 고심하여 적을 토벌하며 의기가 하늘에 뻗치고 열사들이 호응하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린 밥을 모아 양식으로 삼으니 백성을 괴롭혀 모은 쌀 창고는 텅 비었고,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기고의 병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진(鼎津)에서 군사가 출동하자 도망가는 적병이 정신을 잃었고, 무계(武溪)주D-027에서 접전했을 때는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에 찼었다. 관군은 어찌하여 번번이 무너지고 의병은 어찌하여 줄곧 승첩하는가. 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인데, 형(刑)이 시행되지 못하고, 의병이 맺어진 것은 의(義)인데 의는 물러나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그만두고 민력을 후히 기르며, 절진(節鎭)을 봉하는 일을 그만두고 군사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킬 줄을 미리 알았던들 떠다니는 혼령들이 어찌 동래(東萊) 들녘에 흩어지며, 독한 칼끝이 어찌 평양성에 이를 수가 있었으랴.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후회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번에 본도의 배지인(陪持人 지방 관아의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가던 사람) 강만혼(姜萬渾)이 돌아가는 길에 한 장의 과인의 잘못을 서술한 교서로 천리 밖의 내 마음을 전하였으나, 바다와 산을 무사히 거쳐서 진중에 선포가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에 부탁하여 나의 뜻을 설명하여 알리노니, 적정을 계속 염탐하라. 너희들이 나의 글을 볼 것이니, 나의 회포를 어이 다하랴. 성천(城川)의 이슬과 서리에 종묘사직의 쓸쓸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의주 강가에 장전(帳殿)의 소슬함을 부치는도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귀천이 다를 것이 없으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조석으로 간절하도다.
천조(天朝)에서 가엾게 여겨 맹장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명 나라 군사가 이르는 곳에 산악도 빛을 띠우리라. 가을날은 맑고 길은 마르니 바로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줄일 시기로다. 철마(鐵馬)는 대정(大定)ㆍ청천(晴川)에 뻗치었고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江浙)에 줄지었도다. 미친 오랑캐가 죄악을 쌓았으니 천벌이 내려져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의병과 열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일어났음에랴. 곳곳에서 적을 베고 날로 전과를 올리니, 실로 천지가 말없이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국가 재건의 기회로다. 바라노니 그대들이여! 더욱 정충(精忠)을 힘쓸지어다. 듣건대 김성일(金誠一)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寧海)를 지킨다 하니, 각기 좌ㆍ우도 관찰사 등의 호칭을 내리고 대소의 의병장들은 차등에 따라 관직을 내리노라. 너희들은 절제(節制)의 지시를 듣고 또한 서로 계획을 짜내서 돌아가는 적을 맞아 쳐서 그 후미를 공격하라. 적이 머물고 있는 곳을 염탐하여 병영을 야습할 것이니, 멀리서 통제하기 어려우므로 기회를 관찰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노라. 김인갑(金仁甲)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슬퍼하여 판서를 추증하고, 이형(李亨) 등의 전사를 슬퍼하여 아들 하나에게 벼슬을 주노라. 상과 관직을 어찌 상관하며 옥과 비단을 어찌 아끼랴. 영남 지방을 먼저 숙청하고 하루 빨리 나를 맞이해 주기 바라노라. 내 말을 마치고자 하니 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다.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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