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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속의 도산 안창호(1878-193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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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31 01:34 조회1,5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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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5

5) 신민회와 안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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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국내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新民會)였다.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병설하여 청년을 교육하는 것을 표면의 사업으로 내세우면서 이면에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외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400여 명 정수분자로 조직된 단체, 즉 신민회39)를 훈련 지도하였다. 그 때문에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수감된 일도 있었다.40)

39) 1907년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그해 4월 이갑, 전덕기, 양기탁 등과 같이 조직한 비밀결사. 총감독에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에 전덕기, 집행원에 안창호를 선출하였다.
40) 안창호는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 혐의로 3개월간 수감된 적이 있다.


합병된 후에는 이른바 주의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으로 예상함이었던지, 안창호는 미리 비밀리에 장연군 송천에서 위해위로 몰래 건너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동지가 이어 압록강을 건넜다.41)

41) 위해위는 중국 산동반도 끝에 위치한 도시로, 현 지명은 위해. 1398년 명나라 때 왜구의 습격에 대비하여 이곳에 기지를 설치하고 위해위 라는 군대를 두었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을 결정하였고, 이를 위해 4월 안창호, 이갑 등이 출국하였다. 안창호는 중국 산동성으로 망명하여 이른바 '청도회의'를 소집하였다.


경성에서 양기탁42)이 주최하는 비밀회의 통지를 받고 나도 달려가 참석했다. 양기탁의 집에 출석된 인원은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었다. 비밀회의를 열어 지금 왜가 경성에 이른바 총감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전국을 통치하니, 우리도 경성에 비밀리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릴 것,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전쟁을 일으킬 것, 이를 준비하기 위해 이동녕을 먼저 만주에 파송하여 토지 매수, 가옥 건축과 기타 일반을 위임하고, 그 나머지 참석한 인원으로 각 지방 대표를 선정하여, 15일 이내에 황해도에 김구가 15만원, 평남의 안태국이 15만원, 평북 이승훈이 15만원, 강원의 주진수가 10만원, 경성의 양기탁이 20만원을 모집하여, 이동녕의 뒤를 파송하기로 의결하고 즉각 출발하였다.43)

42) 양기탁(1871-1938). 베델과 같이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일제를 규탄하고, 신민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43) 신민회는 1910년 가을 이동녕, 이시영이 독립운동 기지의 후보지를 답사하기 위해 만주로 갔고, 12월 중순 그들로부터 보고받고 단체 이주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경술년(1910, 35세) 11월 20일 이른 아침에 양기탁의 친동생 인탁과 그의 부인이 동행하여 사리원역에서 하차하였다. 인탁 부부는 재령44)으로, 나는 안악으로 돌아왔다.

나는 김홍량과 협의하여 토지와 가산을 팔기 시작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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