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속의 도산 안창호(1878-1938) 03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8-31 21:19 조회1,510회 댓글0건본문
p.285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들을 찾아가 만나 악수하였다. 그때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국사(國史)에 자세히 기록될 것이므로 생략한다. 나는 내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안창호 동지는 미주로부터 상해로 건너와 내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정부제도는 차장제(次長制)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씨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종전에 본국에 있을때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순사 시험과목을 혼자 시험쳐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스스로의 경험과,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쾌히 받아들였다. 자기가 미국에서 본 바 특히 백악관만 수호하는 관리를 두었으니, 우리도 백범 같은 이가 정부청사를 수호하게 되는 것도 좋으니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결정한다 하였다.
다음날 도산은 나에게 홀연 경무국장 임명장을 교부하며 취임하여 근무할 것을 힘써 권하였다. 그때는 국무회의에 각 부 총장들이 아직 다 취임하지 않았으므로, 각 부의 차장이 총장의 직권을 대리하여 국무회의를 진행하던 때였다. 그때 차장 등은 윤현진(尹鉉振), 이춘숙(李春塾) 등 젊은 청년들이므로 노인에게 문을 여닫게 하고 통과하기가 미안하다 하고, 백범이 여러 해 감옥생활로 왜놈의 실정을 잘 알 터이니 경무국장이 적합하다고 인정되었다 한다.
"나는 순사의 자격도 되지 못하는데, 경무국장을 어찌 당할 수 있겠소?" 하니,
도산은 강권하였다. "백범이 만일 거절하여 피한다면 청년 차장들의 부하되기가 싫다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생각할 터이니 거절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시오."
나는 부득이 응낙하고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민국 2년(1920, 45세)18)에 아내가 인이를 이끌고 상해로 건너와 같이 살았다. 본국에서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하니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민국 4년(1922)에 상해로 건너와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에 신(信)이가 태어났다.
---
p.291
---
기미년에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 그간 지내온 일에 대하여 중요하고도 진기한 사실이 많으나, 독립 이전에는 절대 비밀로 할 것이므로 너희들에게 알려주지 못함이 극히 유감이다.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고 이만 그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년 (1929, 54세)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