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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48 ---충렬공의 병법(兵法)과 전고(典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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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7 09:03 조회1,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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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전고(典故, =典據가 되는 선례나 故事)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다고 하고, 또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장이었으므로 병법(兵法)에도 밝았으리라 생각됩니다.

1274년 일본원정시에 하카타만에 상륙하였을때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고 있다.

충렬공 당시에 주로 보았던 병법(兵法)과 전고(典故)에 관한 책은 어느 책인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典故 : 典據가 되는 선례나 故事
*典據 : 말이나 문장 따위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
*古事, 故事 : 옛적의 일, 옛적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 또 그것을 표현한 어구, 이전부터 전하여 오는 규칙과 定例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1274년 일본원정시)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주D-001)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 (주D-02) 이다.” 하며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는데, 홀돈이 말하기를, “수가 적은 편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가 싸우면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유복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배로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주 D-001]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 진(秦) 나라 장수 맹명(孟明) 이 진(晉) 을 치러 갈 때에, 황하를 건너고 나서 타고 간 배를 불에 태웠는데, 이것은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 D-02]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 : 회음후(淮陰侯) 는 한(漢) 나라 장수 한신(韓信) 인데,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강물을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겼다. 부하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兵法) 에 산과 언덕을 뒤로 하고 앞에는 물을 두고 진을 친다고 하는데, 이번에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무슨 까 닭입니까?" 하니, 한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본래부터 나의 심복이 아니니, 장꾼을 불러모아 싸움을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을 앞에 두고 진을 치면 너희들이 모두 뒤로 도망갈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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