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의 버들 심하의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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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1-12-31 07:04 조회1,632회 댓글0건본문
양화의 버들과 심하(深河)의 버들
우리 안동김문 김응하장군과 관련된 글이 있어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출전은 신태양사 발행 이규태 저 『역사산책』입니다.
지금은 천주교 성지가 있는 절두산의 옛 이름은 들머리, 잠두봉, 용두봉이라 하였고 김포와 강화로 연결되는 나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양화진(楊花津)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 나루목에 역신 강홍립(姜弘立)이 살았던 강정(江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조(英祖)때 양화진을 읊은 한 무명시인의 시에 『양화의 버들도 심하(深河)의 버들도 버들은 버들인데 왜 이다지 같은 버들이 다른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 시구가 뜻하는 두 버들의 차이에서 한국인의 두 유형, 양화형과 심하형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볼 필요를 느꼈다. 여기서 말하는 양화의 버들은 강홍립형 인간을 뜻한다. 광해군 10년 명나라는 요동에서 세력을 부식해 가는 누루하치(淸太祖)를 협공하고자 조선에다 출병을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당시 참판이던 강홍립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임명하고 2만 병력을 주어 출정하게 했는데 이 졸장부는 부차령(富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당하자 목숨만 구해주면 투항하겠다고 교섭, 반역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적진에서 우대를 받고 있던 강홍립은 고국에서 그의 가족이 학대를 받는다는 밀고를 받았다. 그는 고국을 휩쓸겠다고 소청하여 3만의 대호군(大胡軍)을 이끌고 우리 북방을 정벌했다.
강화가 진행되었을 때도 강홍립은 호군의 대표로 나와 떵떵거렸고, 우리 조정에서는 이 역적의 노여움을 풀고자 갖은 미소책을 다 썼다. 그의 서자를 보내어 가족 학대의 밀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변명하는가 하면 그의 삼촌인 강곤(姜 )에게 벼락 벼슬을 주고는 강화 회담장에 보내어 설득을 하기까지 했다.
일개 역적에게 아부하고 미소책을 써야하는 한국의 약소성은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강홍립이 모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에 돌아왔을 때 조정의 신하들은 그의 목을 베어 효시(梟示)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대함이 두려워 그에게 눈 한번 흘기지 못했던 이 한국적 상황이 더욱 우리를 비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중의 증오는 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소채를 파는 등짐장수일지라도 이 양화진 강정에 사는 강홍립에게는 무우 한 뿌리 팔지 않았고, 염전에서는 소금 배의 뱃전에 흩어진 소금 한 줌 못주워 가도록 경계했던 것이다. 그가 굶어 죽게되자 나라에서는 특정 상인을 정해 쌀과 소금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그 집에는 양식 나르는 사람이외엔 일년 내내 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았다 한다. 드나들기는커녕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양화진 나루를 지나다가 그 강정이 보이기만 하면 침 세번 뱉는 풍속까지 생겨났다 한다.
심하는 중국 요동의 한 지명으로 강홍립의 좌영부장(左營部將)인 김응하(金應河) 장군이 전사(戰死)한 땅이다. 키가 8척이요, 능히 큰 소 한 마리를 한꺼번에 먹고 승마도 잘 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호마(胡馬)를 타고 달리며 말 위에서 투구, 갑옷, 활집, 전통 등을 벗어 땅에 던지고 말에서 뛰어 내려 모두 주워서 다시 말 위에 뛰어 올랐으니, 그 낼래고 용맹함이 놀라왔다 한다.
도원수 강홍립이 항복하고 그의 지휘관인 좌영장(左營將) 김경서(金景瑞)도 붙잡히고 난 다음 일개 부장인 김응하는 심하의 진지를 지키다가 끝내 처절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전사는 이렇다.
군보통인(軍保通引)이던 김철현(金鐵賢)도 김응하 장군을 따라 큰 버드나무에 기대어 수백 호병을 단 둘이 맞아 싸웠다. 김철현은 엎드려 화살을 집어 주고 김 장군은 화살로 대적을 했다. 그러나 적의 수천 화살과 맞아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칼로 수십명을 베고는 버드나무 밑에 쓰러져 죽었다.
김 장군의 몸에 박힌 화살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방패삼았던 버드나무도 화살나무가 되어 있었다 한다. 호적(胡敵)들은 장군의 용맹에 탄복하고 그 버드나무를 〈장군 버들(將軍柳)〉이라 명명하였으며 이 장군 버들은 현재도 그곳 지명으로 남아 있다 한다.
곧 〈심하의 버들〉은 이 장군 버들을 뜻한 것이다. 양화의 버들과 심하의 버들의 그 까마득한 역사의 거리에서 필자는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옳고 그름이 이토록 이지러질 수 있는 가능성의 거리, 그 거리를 이 무명 시인은 필자에게 손가락 펴고 뼘질을 시켜야만 했나 모를 일이다.
그 후 그(강홍립)은 강정 대들보에 목매어 죽었는데 그 스스로가 목을 매었다고도 하고 또 가족들이 목매어 죽였다고도 한다.
그의 시체는 선산에서도 소외되어 떨어져 묻혔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강로(姜虜)의 무덤〉이라고 침을 뱉고 다녔다 한다. "끝"
우리 안동김문 김응하장군과 관련된 글이 있어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출전은 신태양사 발행 이규태 저 『역사산책』입니다.
지금은 천주교 성지가 있는 절두산의 옛 이름은 들머리, 잠두봉, 용두봉이라 하였고 김포와 강화로 연결되는 나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양화진(楊花津)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 나루목에 역신 강홍립(姜弘立)이 살았던 강정(江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조(英祖)때 양화진을 읊은 한 무명시인의 시에 『양화의 버들도 심하(深河)의 버들도 버들은 버들인데 왜 이다지 같은 버들이 다른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 시구가 뜻하는 두 버들의 차이에서 한국인의 두 유형, 양화형과 심하형을 역사적으로 부각시켜 볼 필요를 느꼈다. 여기서 말하는 양화의 버들은 강홍립형 인간을 뜻한다. 광해군 10년 명나라는 요동에서 세력을 부식해 가는 누루하치(淸太祖)를 협공하고자 조선에다 출병을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당시 참판이던 강홍립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임명하고 2만 병력을 주어 출정하게 했는데 이 졸장부는 부차령(富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당하자 목숨만 구해주면 투항하겠다고 교섭, 반역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적진에서 우대를 받고 있던 강홍립은 고국에서 그의 가족이 학대를 받는다는 밀고를 받았다. 그는 고국을 휩쓸겠다고 소청하여 3만의 대호군(大胡軍)을 이끌고 우리 북방을 정벌했다.
강화가 진행되었을 때도 강홍립은 호군의 대표로 나와 떵떵거렸고, 우리 조정에서는 이 역적의 노여움을 풀고자 갖은 미소책을 다 썼다. 그의 서자를 보내어 가족 학대의 밀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변명하는가 하면 그의 삼촌인 강곤(姜 )에게 벼락 벼슬을 주고는 강화 회담장에 보내어 설득을 하기까지 했다.
일개 역적에게 아부하고 미소책을 써야하는 한국의 약소성은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강홍립이 모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에 돌아왔을 때 조정의 신하들은 그의 목을 베어 효시(梟示)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대함이 두려워 그에게 눈 한번 흘기지 못했던 이 한국적 상황이 더욱 우리를 비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중의 증오는 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소채를 파는 등짐장수일지라도 이 양화진 강정에 사는 강홍립에게는 무우 한 뿌리 팔지 않았고, 염전에서는 소금 배의 뱃전에 흩어진 소금 한 줌 못주워 가도록 경계했던 것이다. 그가 굶어 죽게되자 나라에서는 특정 상인을 정해 쌀과 소금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그 집에는 양식 나르는 사람이외엔 일년 내내 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았다 한다. 드나들기는커녕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양화진 나루를 지나다가 그 강정이 보이기만 하면 침 세번 뱉는 풍속까지 생겨났다 한다.
심하는 중국 요동의 한 지명으로 강홍립의 좌영부장(左營部將)인 김응하(金應河) 장군이 전사(戰死)한 땅이다. 키가 8척이요, 능히 큰 소 한 마리를 한꺼번에 먹고 승마도 잘 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호마(胡馬)를 타고 달리며 말 위에서 투구, 갑옷, 활집, 전통 등을 벗어 땅에 던지고 말에서 뛰어 내려 모두 주워서 다시 말 위에 뛰어 올랐으니, 그 낼래고 용맹함이 놀라왔다 한다.
도원수 강홍립이 항복하고 그의 지휘관인 좌영장(左營將) 김경서(金景瑞)도 붙잡히고 난 다음 일개 부장인 김응하는 심하의 진지를 지키다가 끝내 처절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전사는 이렇다.
군보통인(軍保通引)이던 김철현(金鐵賢)도 김응하 장군을 따라 큰 버드나무에 기대어 수백 호병을 단 둘이 맞아 싸웠다. 김철현은 엎드려 화살을 집어 주고 김 장군은 화살로 대적을 했다. 그러나 적의 수천 화살과 맞아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칼로 수십명을 베고는 버드나무 밑에 쓰러져 죽었다.
김 장군의 몸에 박힌 화살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방패삼았던 버드나무도 화살나무가 되어 있었다 한다. 호적(胡敵)들은 장군의 용맹에 탄복하고 그 버드나무를 〈장군 버들(將軍柳)〉이라 명명하였으며 이 장군 버들은 현재도 그곳 지명으로 남아 있다 한다.
곧 〈심하의 버들〉은 이 장군 버들을 뜻한 것이다. 양화의 버들과 심하의 버들의 그 까마득한 역사의 거리에서 필자는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옳고 그름이 이토록 이지러질 수 있는 가능성의 거리, 그 거리를 이 무명 시인은 필자에게 손가락 펴고 뼘질을 시켜야만 했나 모를 일이다.
그 후 그(강홍립)은 강정 대들보에 목매어 죽었는데 그 스스로가 목을 매었다고도 하고 또 가족들이 목매어 죽였다고도 한다.
그의 시체는 선산에서도 소외되어 떨어져 묻혔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강로(姜虜)의 무덤〉이라고 침을 뱉고 다녔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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