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51 ---복암 충지(1226-1292)의 <원감국사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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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7 16:03 조회1,475회 댓글0건본문
호 복암(宓庵) 원감국사(1226-1292)의 법명은 법환(法桓)이었는데, 뒤에 충지라고 고쳤다.
원감국사의 시문집은 원래 <원감국사어록>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충렬왕 27년(1300년)에 간행되었는데, 뒤에 국내에 전하지 않자 최남선이 일본에서 구해왔다. 송광사 주지 설월선사가 임석진을 시켜 유고를 더 수집한 뒤에 보완하여 출간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도 그의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젊은 시절 벼슬했으므로, 뒷날에도 관리들과 주고받은 시가 많이 있다.
<원감국사어록>에 ---도원수 김시중(=김방경)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가 실려 있고, <동문선>에도 실려 있다.
■ -한국의 한시 38- 고려시대 승려 한시선 (허경진 옮김, 1997.11, 평민사)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원감국사(1226-1292)의 법명은 법환(法桓)이었는데, 뒤에 충지라고 고쳤으며, 호는 복암(宓庵)이다. 호부원외랑 위호소(魏號紹)의 아들인데, 9세부터 글을 배워 19세에 장원급제하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29세에 출가해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서 수계하였으며, 41세에 감로사 주지가 되었다. 61세에 원오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으며, 7년 동안 사주(社主)로 있으면서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票)> <조계산수선사주복전표(曹溪山修禪社主腹田票)>를 올려 몽고에 몰수된 사전(寺田)을 돌려 달라고 청하였다. 이 글을 본 원나라 세조가 감동하여 땅을 돌려주고, 그를 북경으로 청하여 빈주(賓主)의 예로 맞았으며, 금란 가사와 백불(白佛)을 선사하였다. 원감국사는 시호이다.
원감국사의 시문집은 원래 <원감국사어록>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충렬왕 27년에 간행되었는데, 뒤에 국내에 전하지 않자 최남선이 일본에서 구해왔다. 송광사 주지 설월선사가 임석진을 시켜 유고를 더 수집한 뒤에 보완하여 출간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도 그의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젊은 시절 벼슬했으므로, 뒷날에도 관리들과 주고받은 시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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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지 (沖止 1226∼1292(고종 13∼충렬왕 18)
고려시대 승려. 성은 위씨(魏氏), 속명은 원개(元凱). 어려서부터 선가(禪家)에서 득도하기를 꿈꾸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관직에 나아가 1244년(고종 31) 문과에 장원하였고 재직시 시문(詩文)으로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29세 때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다. 전국을 순례하며 수도하였고, 66년(원종 7) 김해군(金海郡)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74년 원(元)나라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군량미 조달 명목으로 원나라에 빼앗겼던 근읍(近邑)의 토지를 되돌려 받았는데, 이 표는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76년(충렬왕 2) 충렬왕은 충지를 선종의 가장 높은 법계인 대선사에 임명하였다. 86년 원오국사의 유언에 따라 수선사(修禪寺) 제 6 세가 되었으며 수선교화(修禪敎化)에 몰두하며 수선사 전통을 계승하였다. 불교 삼장(三藏)에 이해가 깊었고 문장·시에도 능하여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고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지눌(知訥)의 종풍을 계승하였다. 저서에 《원감국사집》 등이 있다.
■ 원감국사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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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중도에 <원감국사 어록> 국역본 있음. 추후 보완---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동문선 게재 내용과 같음---
■ 동문선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현관(玄關 불문에 들어가는 관문)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화는 감동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옵고, 주벌(朱閥 궁궐)의 아래에 복을 비는 정성은 지극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물며 막측(莫測)한 땅을 정벌하려면, 미연의 우환을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현후(賢侯)께서는 성대에 태어나서,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두 왕대에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습니다. ♠중봉(中奉 중봉대부)과 ♠중찬(中贊)이 모두 높은 직위요, ♠상장(上將)과 ♠상상(上相)이 함께 귀한 자리입니다.
초변(貂弁)과 선관(蟬冠)은 덕망이 중하여서 백관들이 무릎걸음으로 공경을 표하고, 호부(虎符)와 귀인(龜印)은 위엄이 높아서 삼군(三軍)이 팔뚝을 떨면서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융거(戎車)를 몰아 왕궁 밖으로 나와서, 장차 훼복(卉服)(주D-001)들을 무찌르려고 1만 군사를 몰아 나감을 제갈공명이 촉(蜀)을 출발하는 듯하고, 1천 척의 배를 출동함은 왕준(王濬)(주D-002)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보다 승합니다. 이러한 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되면 얼마 안 가서 개선(凱旋)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묘한 공양을 장만하여, 특별한 법식을 차립니다.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처님의 원명한 거울에 맞으시기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한 돛이 바다를 잘 건너서 왜구(倭寇)들의 항복을 보게 되고, 일만 깃발이 무사히 돌아와서 순 임금 뜰에 첩서를 올리듯 하소서. 공명을 죽백(竹帛)(주D-003)에 길이 드리우고, 세월은 소나무와 참죽나무[椿]처럼 새로워지이다.
[주 D-001] 훼복(卉服) : 섬 오랑캐는 풀[卉]로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해서 일본(日本)을 훼복이라고 말한다.
[주 D-002] 왕준(王濬) : 중국 삼국시대 말기 진(晋) 나라 사람.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오 나라 서울을 함락시키고 오 나라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주 D-003] 죽백(竹帛) :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지 못하였던 때에는 모든 기록을 대[竹] 가지나 비단[帛] 폭에 썼었다. 그래서 역사를 죽백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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