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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일실사효 정려( 一室四孝 旌閭) 기록 더듬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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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22 16:51 조회2,0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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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실사효 先後系

◎고조부 : 화산군 3김주(1512-1563)

◎증조부 : 1김정남

◎조부 : 부사공 1김희(1567-1635)

***1김정기, 후손 여주 백양동 세거, ***3김태기, 후손 광주 중대면(현 송파), 양주 등 여러 곳으로 세거
◎부모 : 2김익기 배위 평양조씨, 후손 이천 밤골 세거

●효자효녀 일실사효 : 김선, 김구, 김석, 김씨(이명삼의 처)
***송시열(1607-1689) : 화산군 현손 김석의 스승이고 김성렴의 스승이며, <일실사효 記> *현재 기록이 없어 알수 없음

***(김선의) 1김성유 : 행장(종자 김식 찬)이 전하고 묘갈(여서 영상 조현명 찬)이 있으며 돈녕도정을 역임. 조현명(1690-1752)은 김희 묘갈도 찬
◎자 : 4김성함, 행장(손 김득제 찬)이 있다.

***1김욱, 2김추, 4김직 : 1705생 1741생원, 5김정
◎손 : 3김거 : 행장(자 김득제 찬)이 있다.

***1김득제, 2김득침, 3김득유. 4김득이 (*김득종 사마방목 기록, 족보 대비 필요)
◎증손 : 5김득종 : 1745생, 1768생원




■ 일실사효 정려 현판

현판1 : 정려 현판 (1754년, 영종 갑술 7월, 병명정려)
---가로 175* 세로 39* 두께 2.5
---원래 붉은 바탕칠에 흰색 글씨, 표면 벗겨낸 흔적 확연.

현판2 : 一室四孝 사액현판 (영조 친필이라 함)
---가로 111* 세로 31* 두께 2.8
---원래 흰색 바탕칠에 하늘색 글씨, 표면 벗겨낸 흔적 확연.

현판3 : 일실사효跋 현판 (1804년 순조4, 숭정기원후 3갑자 3월, 증손 得悰 泣血謹跋)
---가로 63* 세로 39* 두께 2.7
---원래 하늘색 바탕칠에 흰색 글씨, 표면 벗겨낸 흔적 확연.
---원래 액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현판만 있음.




■ 일실사효 경과

공(김선)의 할아버지 부사공(김희, 1567-1635)은 광해군때를 당하여 홀로 대의를 지켰으며, 더럽지 않은 절개를 세워 지극히 돈독하였다.


김선(金銑)은 율면 본죽리에 살았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사렴(金士廉)의 11대손이며,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 花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동생 김구, 김석, 김씨(이명삼의 처)와 함께 4남매가 효행으로 이름이 났다.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김거(득종의 부)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선조들의 효행이 점차 잊혀져서 나타내지 못하게 될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이러한 간절한 말을 국왕에게 상언하여 여러 대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4효자의 효행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고, 효자 정려를 받았으나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다.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현판 : 영종 갑술 7월 병명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현판 : 영조 친필)가 내려졌다.


김득종(김선의 증손자, 김거의 아들, 1745생 1768생원)은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가하여 여러 형제·자식들과 더불어 정려 짓기를 의논하여 그 일을 마치게 되었다. 1804년 <일실사효 발>을 (현판 : 숭정기원후 3갑자 3월, 증손 得悰 泣血謹跋) 적었다.

지평공 4남매는 효자효녀로 증직되었는데
김선은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김구는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김석은 통훈대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이명삼의 처) 김씨는 감역에 증직되었다.

사당은
현재 교식(용진의 자, 기호의 제) 家에 보존되고 있다.


이천 밤골 마을 상단 후산에 일실사효 정려각이 있어 현판 3개가 이에 걸려 있다가

어느 때인가 일실사효가 소실되어 현판은 김용진家 (金龍振, 泰항, 1954년 본죽국민학교 설립 주관, 육성회장 起昌, 桓演 부지 7,000평 희사) 문전(門前)에 (주변에 터 주춧돌이 있음) 세워져 있던 것을

1940년대 초 여주 백양동에서 우암사(寓菴祠)를 이천 밤골로 이전 개축(改築)할 때 (*교식 누이 76세, 정회 72세 어릴때 우암사 이건공사 본 기억이 있음. 득현 사손 하경 공사감독)   그 정문(旌門)을 옮겨 세웠다가

우암사(寓菴祠)도 퇴락하여 정문과 담장도 무너진지 오래고 남아 있는 사당 건물도 무너져 가고 <이천시지> 현판 3개도 잃어버림

10여년전 1990년대 초 교식(용진 자, 기호 제)이 천안 고물상에서 현판 3개를 찾아 와서, 현재는 교식 가에 보관하고 있다.

1998년 10월 泰相이 어머니(경주김씨)의 생전 소원에 따라 우암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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