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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족산. 자점보(자재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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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09-23 11:39 조회2,4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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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산은 장호원읍 남서쪽에 우뚝 솟은 해발 402m의 산으로 백개의 발이 달린 커다란 지네가 이 산에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백족산’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백족산의 서북면은 경사가 완만한 반면,  남동면은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어 산줄기가 맺힌 그 밑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기슭에 청미천을 막아 쌓은 보(洑)가 있으니,  인조반정의 공신 김자점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  또는  ‘자재미보’ 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유래 1>

  족산 산중에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낟고 하여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김자점이 이 명당자리를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政)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권세를 잡게 되자 부친의 묘를 이곳에 썼다.  그러나,  풍수설에 이르기를 비룡(飛龍)은 물이 있어야 마음껏 조화를 부릴 수 있으니,  비룡상천형에는 반드시 그 앞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청미천만으로는 물의 세력이 부족한 것이 한가지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가로질러 석축을 쌓아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는 인공호수를 만듦으로써,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비룡상천의 명혈(名穴)이 되도록 하였다.

 그 후 가뭄이 들면,  인근지역의 농부들이 자점보의 물을 몰래 뽑아 썼던 탓에 지금의 장호원읍 오남리(梧南里) 일대는 가뭄을 모르는 옥토가 되었다고한다.

   비룡상천의 명당을 차지하게 된 김자점은  공신으로 득세하고 그의 손자를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부원군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 것 또한 부친의 묘자리를 잘 쓴 덕분이라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믿었을 것이다.

   김자점이 역모죄로 몰려 죽은 후 백족산에 있는 그 부친의 묘를 파헤쳤더니 장례를 지낼 때 엎어서 묻었던 시체가 거의 용의 모습으로 화하여 자점보 쪽을 향해 굴을 뚫고 전진해 가던 중이었더라고 한다.  결국 형리들이 용의 목을 잘랐는데 지금도 백족산 기슭에 있는 이 비룡상천의 명당자리에는 그때 용이 뚫은 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바람이 몹시 부는 날도 이곳만은 바람기가 조금도 없이 잔잔하다고 한다.

  자점보는 지금도 그 형태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오남리 벌판에 물을 대는 중요한 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래 2>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 때부터 보아두었는데  인조반정으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한다.  청미천의 물만으로는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뽑아 써서 근처 일대는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업 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위의 두가지 유래로 보면 낙서공께서 역모로 돌아가신 후 집권세력에 의하여 전설이 만들어진 느낌이 듭니다(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던 것처럼...)
자점보(일명; 자재미보)는  낙서공께서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이 분명하며 지금까지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업용수의 수원지라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2004년 9월의 자점보는 2년전 윤만종친께서 방문했을 때에 비하여 형태상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또 세월이 흐르면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며 자점보가 자연 소멸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면 당시의 낙서공께서 자점보를 축조하실 때의 애민 정신은 길이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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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자점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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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전의 자점보 모습(윤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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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점보를 배경으로..(좌로부터  용주. 항용. 윤만. 주회. 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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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족산을 배경으로...(좌로부터 발용. 윤만. 주회. 용주. 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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