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정기산행 후기 (대구 팔공산록) 02 --- 동화사 홍진국사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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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11 15:55 조회1,627회 댓글1건본문
<문경공묘>와 <만보정>을 뒤로 하고
문영공(휘 순)선조님 묵향(墨香)이 묻어 있는 팔공산 기슭을 돌아 오른다.
이곳 순회도로도 새로 포장하여 까만 아스팔트에 새하얀 선이 산뜻하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초가을 팔공산은 황홀하고 넉넉하다.
동화사 서문에 당도하여 경내로 들어선다.
봉서루 계단 올라 대웅보전 마당. 보수공사중이다.
우리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에 다가서고 있다. 고즈넉한 구름다리를 건너
금당선원 입구에 외로이 서 있는 도학동 석조부도(보물 제601호)에 오른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부도의 기품이 듬직하면서도 귀족적이고 우아한 듯하다.
이 부도는 홍진국사 부도라 전해 오는데
이곳에서 1km 아래 내학(內鶴) 마을에서 옮겨 온 것이다.
1298년 김훤(金暄) 撰, 김순(金恂, 1258-1321) 선조님 書로 세운
동화사 홍진국사비는 도궤(倒潰)되어 없어진지 오래다. 현재 비편조차 확인할 길 없다.
우리 문중의 비조이신 대보공(휘 알지)의 탄강설화 <금궤도(金櫃圖)>를 그린
조속(1595-1668)은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여 <금석청완>을 엮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금궤도와 금석청완이 소장되어 있고
금석청완에 홍진국사비 탁본이 실려 있다.
비명제목 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한 것이다.
이우(1637-1693)가 1668년 엮은 탑본첩.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 책에도 비교적 선명한 홍진국사비 탁본 1점이 실려 있다.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으로 탁본 右上 4-5글자는
장서각 소장 탁본의 左下 조각과 같은 부분이다.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탁본 實物”1점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 柳正秀(작고)藏 舊탁본(154.5×84.8)이다.
비편 6조각을 비문 내용에 맞추어 배열하여 탁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탁본이라 귀중한 유물이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홍진국사비는 어디에 있었는가?
내학 마을. 홍진국사 부도가 있던 주변에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동안 이 비를 찾아 얼마나 헤멨던가?
여러 후손들이 수많은 발걸음을 되풀이해 왔다.
재철 아저씨는 대여섯차례, 항용 선생님은 서너차례
모두들 한두번은 다녀간 길이다.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홍진국사 부도가 있었던 위치를 물어물어 가기로 했다.
체육대회를 마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대구 청장년회 임원 일가님들께 양해 전화를 넣는다.
죄송하기는 하나 할수 없다.
그동안의 목마름을 풀어야만 했다.
지나가는 스님들은 물어봐도 멀뚱멀뚱
부도가 있었다던 내학 마을을 묻고 묻고 또 묻고 내려간다.
동화사 일주문 아래 학부 마을에 도착
슈퍼에도, 식당에도, 경로당에도 노인분들 있는 곳은 모두 휘젓고 다닌다.
다행히 나이 여든 넘으신 촌로를 만나 일말의 단서를 찾아냈다.
촌로를 모시고 그곳을 찾아 올라갔다.
동화사 입구 일주문 앞에서 우회전. 그곳에는 대구교육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 교육원 오른편 언덕이 전에 부도가 있던 위치란다.
지세가 과연 아늑하고 포근하다.
앞 쪽에 마을이 있는데 '안 학부'라고 부른단다. 한자로는 '內鶴'
부도가 있었다던 구릉은 마당으로 변해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근에 박혀 있을 수도 있는 비편 조각, 돌 조각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교육원 주변에 수없이 많이 조경되어 박혀있는 옛 돌을 훑어 다닌다.
그 속에 비편이라도 끼워 있지 않나 하여.....
그러나 오늘은 홍진국사비가 서 있었을 개연성이 가장 많은 위치를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수확이고 보람이었다. 가슴 속이 다 시원하다.
해는 넘어가고 황홀한 경치와 분위기는 우리를 붙잡는다.
길바닥에 편한대로 앉아 남은 술과 다과를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과 시원함을 함께한다.
추사 김정희 42세, 1827년 1월 26일,
(청나라)장심이 (추사 동생)김명희에게 장찰을 보낸다.
‘桐華 2비’등 여러 탁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 정도는 동화사 홍진국사비 탁본이 아니었을까?
추사 선생 유품을 찾아 나서야 하나?
아니면 청나라 장심 후손을 찾아 그의 유품을 찾아 나서야 하나?
선조님 필적 하나 찾는 것이 이토록 힘이 든단 말인가?
그러나 굽히지 않으리라. 중국까지도 쫓아가서 찾아내리라 다짐하여 본다.
하루종일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신 진종 님, 태도 님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애쓰시는 할머니처럼
손님맞이에 온 정성을 쏟으신 정중 님, 희준 님과의 아쉬운 작별
팔공산을 뒤로 하고 북대구IC로 향한다.
길이 어찌나 막히는지 북대구IC까지 시간반도 더 걸린다.
까만 밤길을 달려 서울 종합운동장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24시 00분
재철 아저씨는 손주가 차를 갖고 마중나와 있다.
80고령에도 40대보다 더 정열적이시고 젊으신 분이시다.
나이 60 넘었다고 다 늙는 것이 아니고
나이 20이라 하여도 다 청춘은 아니란 말이 있다.
이상으로 후기를 마칩니다.
참가하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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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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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해신3 (2003, 최인호, 열림원)
p.91
오늘날 경주에는 민애왕(김명)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무덤 하나가 남아 있는데, 다른 왕릉과는 달리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봉토분에 불과하다.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동화사(桐華寺)에 있는 삼층석탑 1층의 탑신 속에서 민애대왕 석탑 사리호(舍利壺)가 발견된 것이다.
민애왕이 불행하게 죽은 뒤 24년 후인 823년. 경문왕(景文王)이 탑을 세우고 그 탑 안에 넣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에는 불행하게 죽은 김명의 유골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오직 몇 자의 명문만 남아 권세의 무상함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