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方慶 열전 02 (출생과 선계② : 1-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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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04 17:11 조회2,612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02 (출생과 선계② : 1-15세)
▣ 김방경 연구 (이상철, 1986, 청주대)
김방경은 강종1년(1212)에 태어났는데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에 충렬왕26년에 "以病卒年89"라는 기록을 통해 역산>
자는 本然이요 안동사람으로 신라 경순왕의 원손이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 조부는 한림 敏成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안동대도호부 인물조 김창조,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 백부 敞은 경순왕의 14세손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안동대도호부 인물조 김창, 김효인, 김방경조> 희종조에 등제하여 벼슬이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최이를 섬겨 정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고려사 열전 권15 김창전, 고려사 지 권27 선거 고종 29년조에 "29년 4월 추밀원부사 김창 지공거" 라 하여 지공거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부친 孝印은 글씨를 잘 쓰고 등제하여 벼슬이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고려사 지 권27 선거 고종37년조에 "상서좌승 김효인 동지동거"라 하여 동지공거를 역임하였다.>
이와같이 김방경은 안동김씨로서 어느정도 가문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한국계행보 천 p641에 의하면 김방경 이전까지의 안동김씨 가계는 다음과 같다.>
*利請 : 상락군 이부상서, 신라 경순왕 11세손
*義和 : 추봉 위위부 주부
*敏茂(?) : 문과 한림직사관
*孝印 : 문과, 병부상서 한림학사, 性嚴毅小志學 善書, 등제 고종40년 졸
김방경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는 최씨무신집권기이나 김방경이 출생하여 성장하던 때의 사실은 별달리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에 일부 기록이 보일 뿐이다.>
▣ 김방경 연구 (윤애옥, 1992, 성심여대)
김방경은 안동김씨로서 자는 본연이며 신라 경순왕의 원손이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그는 강종1년(1212)에 태어나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충렬왕26년 89세로 병사했다는 기록을 통해 역산> 충렬왕26년91300) 89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방경은 무신집권기에 출생하여 고려의 대몽항쟁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여원관계가 성립될 무렵, 무인으로 크게 출세하여 당시 고려의 최고 지위에까지 올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을뿐 아니라 그의 가문을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끌어 올리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집안인 안동김씨는 그의 4대조인 金利請대부터 권력의 표면에 나타났다. 金利請은 신라 경순왕 11세손으로 상락군과 이부상서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증조부인 義和는 위위부 주부였다. <조용승, 한국계행보 천 p641, 1980>
⊙ 그의 조부는 한림 敏成이나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며, 다만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敏成의 집에서 자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 백부인 孝恭(敞)은 벼슬이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최우 정권 아래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권102 김창전>
⊙ 부는 孝印으로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전>
이로보아 이 가문은 무신집권기에도 쇠퇴하지 않고 관인을 배출한 가문임을 알 수 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삼한공신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란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敏成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최우의 집권기에 재추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상서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안동김씨였는데 안동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 (?-978)에게서 비롯되었다. 김부는 9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방경 선대 가계도>에 보이는 것처럼, 이 중에 넷째 아들인 대안군 殷說은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외손자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1979 p136 고려평장사보국대안군김은열묘>
그는 관직이 공부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叔承이 공부시랑평장사로서 안동에 봉해짐으로써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방경 선대 가계도]
*은열 :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소생, 태조의 외손자,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 : 공부시랑 평장사
*일긍 :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
*이청 : 상락군, 안동태수
*의화 : 사호
*민성 : 과거,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승
*창 : ?-1256,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효인 : 문과, 병부상서, 한림학사
*방경 (문하시중), 지경 (밀직부사), 현경 (좌정승)
<고려사 김방경 열전, 안동김씨대동보, 만성대동보, 묘지명 참조>
숙승의 아들 日兢은 삼한공신에 책봉되었고, 금자광록대부 상서우복야 태사대광의 지위에 올랐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중편 p1> 김방경의 시조는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서 또 삼한공신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귀족이었던 것이다.
김방경 가계가 안동에서 거주하게 되었던 것은 日兢의 아들 利請때부터 였다. 이청은 상락군 안동태수로서 고령 즉 안동에 거주하였으며 :수적안동 자공시"<안동김씨대동보 권1> 라 한 것처럼 그로부터 안동이 본적지로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義和는 사호를 지냈다.
김방경의 선대는 이청과 의화 때 지방관으로 밀렸던 것이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무신란이 일어난 때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 가계가 일시 지방으로 밀렸던 것이 무신란의 발생과 관계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의화의 아들 敏成이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승을 지냄으로써 이 가계는 다시 중앙에 진출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중편 p1, p202 김방경묘지>
그리고 민성의 두 아들도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에 진출하였다. 큰 아들 敞(초명 孝恭, ?-1256 고종43)은 희종조에 등제하여 직사관 상서우승을 거쳐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 권15 김창전> 둘째아들 孝印 역시 희종때에 문과에 합격하였고, 이후 한림학사 병부상서를 지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창 효인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인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김창은 중용되었다.
당시에 김창의 위치를 아는데 다음의 사료는 참고된다.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김창은 최이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전주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규보나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재추를 지냈던 인물들도 김창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이?이나 최이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유천우는 김창에 의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남인국, 최씨정권하 문신지위의 변화, 대구사학22, p102-104, 1983,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9, 새문사, 1987>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孝印도 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5>. 이 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삼한공신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敞과 孝印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金敞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金方慶의 선대는 신라 왕족의 후예이며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서 출발하였고, 또 삼한공신의 후예로서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가문이었다. 무신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 가계는 지방으로 밀려 났으나 무인집권기에 다시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이어 최충헌 집권때 등제한 金敞, 孝印 형제가 최우집권때 크게 중용됨으로써 이 가계는 다시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이 가계는 번창하여 갔다. 金敞은 후사가 없었고, 동생 孝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세 아들은 고위직에 올랐는데 金方慶은 바로 孝印의 큰 아들이었다. 둘째아들 之慶은 밀직부사에 이르렀고, 셋째아들 玄慶은 좌정승에까지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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