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 <세덕사> 향사 안내-봉안 선조님 소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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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10-16 10:30 조회3,435회 댓글0건본문
金恒鏞
6)한문 원문
意表伏承情書 親患乃況卽相慰佇十分 弟若若之餘百病 來侯万者從臨中愁心 示事推盡倒 治下本面無荷南 卽荷同而緊到 幼死有男四人 皆屬良役 有父信文卷 然後幸得拾尋荷男之母名 後假書監各 仰餘萬不宣 伏惟 兄上謹拜 上謝狀
丁酉七月二十二日 弟 싸인
7) 번역문
삼가 고마우신 편지를 받아 감사의 뜻을 표하나이다.
어버이께서 병중에 계신데, 이에 하물며 계속 대기하며 서로 위로하여야 함에야.
제(弟)는 여러 가지 병이 길게 늘어지는 나머지 문안을 오는 많은 사람들을 따라 맞아야 하니 걱정입니다.
부탁하신 일을 열심히 다해 보았습니다. 관할하는 본 면(面)에는 하남(荷男)이가 없기에 즉시 하남이를 대동하고 긴급히 도착해 보니 어린아이가 죽은 것이 남자가 네 명이 있는데 모두 양역(良役)에 속하여 부신(父信)의 문권(文卷)에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천득(千得)이라는 하남(荷男)어미의 이름을 찾아내어 그 후에 임시로 현감에게 각각 편지를 썼습니다. 삼가 나머지 모든 것을 적지 못합니다.
삼가 형님께 근배하며 감사의 글월을 올리나이다.
*주1-이 서찰은 1657년(효종 8. 공 51세) 공이 1653년 민정(閔鼎)과 함께 올린 상소사건의 소용돌이에 있다가 의주부윤으로 가 있을 때 작성한 것으로 보임.
*주2-내용은 하남이란 자의 조사 요청에 대한 답신으로 보이나 수신자는 미상임.
3. 친필 시문
<친필 시>
<判書公 諱 徽 親筆 詩-偶讀宋潛溪靜寶詩次韻>
1)발견일 : 2002. 1. 26.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규장각(서울대) 4)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 5)편집,윤문인 : 金恒鏞
6)한문 원문 및 번역문
偶讀宋潛溪靜寶詩次韻--示雋及閔生庭棋二前(우연히 잠계(潛溪) 송정보(宋靜寶) 시의 운에 따라-- 준과 민정기 두 분께 보입니다.)
林扉面山開 숲 속 사립문은 산을 마주하여 열려있고
揷籬村溪隔 울타리 둘러 처진 마을은 계곡 사이에 있는데
一室靜圍書 방안에서 고요히 책을 읽다가
千巖閑杖屐 바위산에 한가히 막대 짚고 나서네.
雨餘署氣淸 비 온 뒤 더웠던 기운은 시원해지고
溪邊人事寂 시내 가엔 인적이 적막한데
時時挾冊來 때때로 책을 끼고 오니
汝背留行跡 그대들 행적만 남는구려.
幽庭草積翠 그윽한 정원엔 풀빛이 파릇파릇하고
曲渚沙鋪明 굽이진 모래톱엔 맑은 모래가 펼쳐져 있는데
風驅酷暑去 바람은 무더운 더위 앗아가고
鳥呼殘夢驚 지저귀는 새 소리에 남은 꿈을 깨네.
靜居流何修 고요히 사는 삶 얼마나 많이 흘렀는가
年光倏遞更 세월은 잠깐 사이에 바귄다는데
小壯勉究業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庶以慰世情 모두가 이 세상을 정겹게 위로하네.
庚戌 夏(1670년. 현종 11. 공 64세. 여름. 공께서 병조참판 시절)
4. 친필 서찰 3, 4
<운곡보첩>(판서공의 서찰이 실려있는 서책 표지)
<판서공 친필>
1) 발견 일시 : 2003. 7. 2) 발견자 : 김주회(안). 3) 발견장소 : 국립중앙도서관 고전문헌실
4) 촬영 및 제공 : 항용(제) 5) 해독 및 번역 : 익수(보명 태익. 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 위원)
6) 해독 및 번역
가)서찰 3 (상기 사진 좌)
(1)작성 일시 : 미상. 본문 내용의 상복으로 보아 부친(휘 시양) 몰년인 1643년(인조 21. 작자 37세 ) 또는 모친(경주이씨) 몰년인 1653(효종 4년. 작자 47세)으로 추정.
(2)해독 원문
再昨 蒙枉殮感 伏惟夜來起居 病未委謝罪 歎令之疏草 幸投不見 謹完上 不具式.
服人 徽
(3)역문
그저께 염(殮)을 할 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가 밤에 오셔서 계시다가 병으로 쓰러지지는 않으셨는지 사죄를 드립니다. 영감의 상소문 초안(疏草)에 감탄하였습니다. 행여 (원고를) 보내도 보지 못했는데 삼가 완결되면 올리겠습니다. 예절을 갖추지 못합니다.
상복을 입은 휘(徽)
나)서찰 4 (상기 사진 우)
(1)작성 일시 : 미상,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작자가 이조판서 시절인 1675년(숙종 1. 작자 68세) 경으로 추정.
(2)해독 원문
嶺伯則首擬 而不得湖 則可望 而爲之 其得其失 莫非數也. 所謂天難감(食+감)者是也. 今而後 庶至失侶無倚之懷 而亦不得驕 至委則悼亡之心 一倍難堪也. 熢燧狀二度奉呈耳. 前伯書寫之役 宿憂令之辭 朝知去不遠 而守鎖不能就拜 尤切
忠不備式. 卽之欠各式
(3)역문
영도백(嶺道伯-경상도 관찰사)이면 먼저 논의를 해야 하고 호도안무사(湖道按撫使)이면 망(望:왕에게 추천하는 三望)에 더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하는 것은 헤아려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위 하늘이 굶주리게 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옳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 거의 짝을 잃게되어 마음속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또한 교만할 수도 없고 쓰러지게라도 되면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은 갑절이나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봉수장(熢燧狀: 봉수책임자의 임명장)은 두 번을 드렸습니다. 전의 도백의 편지에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 떠나도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므로 나아가 인사를 하지 못하여 더욱 간절하고 섭섭합니다. 정성으로 예의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곧장 쓰다보니 각각 격식에 모자랍니다.
5. 친필 서찰 5
* 발견 일시 : 2003. 9. 18 * 발견자 : 金榮煥(문), 金勃鏞(군) 1차 발견. 제보. * 발견장소 : 아트서울 서화 전문 매장
* 해독 및 번역 : 金益洙(보명-泰益. 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 위원) * 윤문 및 편집 : 金恒鏞
* 작성 일시 : 1653(효종 4. 필자 47세) 2. 11 *매입소장자 : 金斗應. 2003. 10. 1. 55만원 매입 소장
* 수신자 : 미상(필자의 근친 어른(時亮-紳의 父, 또는 근친)께 올린 것으로 추정)
* <서울 아트서울 전문 매장 소개 내용>
번호: kh-101. 성명:사휴정 김휘(四休亭 金徽 1607-1677). 품명:간찰(簡札). 년도 : 癸巳 二月十一日 (1653년).
크 기: 62x23cm. 가 격: 550,000 원
1. 해독 원문
奉謝
歲改以後 音墨尙阻 居常 耿 始承問 書 而稍慰積 之懷 經後且有日 依舊是落落 卽惟殷春 隸履珍率 庸徵稅 戒末一是病 已極自 而承接紳音 則如經滄桑 世界此何厄會年 運是矣 惟承輔德 侄兒無警耳 示事 豈可忘諸懷 而然無好 道理 奈何 第俟之語 不認以例談也 何餘 然
不備 謝式 癸巳二月十一日 戒末 徽 頓
2. 번역문
감사히 받았습니다. 해가 바뀐 이후 편지를 아직까지 못하여 항상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문안편지 받고 쌓였던 생각에 다소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나고 난 후 또 며칠이 되니 예전대로 고독해졌습니다. 곧 풍성한 봄철인데 관청의 일 잘 보시고 징세하는 일에 바쁘시겠습니다.
계말(戒末)은 한번 병들고 나니 고단함이 이미 극에 달해 스스로 두렵습니다. 그리고 신(紳)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상전이 벽해가 된 듯 세상에 年運이 이처럼 무슨 액(厄)을 만났단 말입니까? 삼가 도와주신 덕을 입었으니 조카가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부탁하신 일은 어찌 그 생각을 잊었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도리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다만 기다리시라는 말을 일러두는 말로 인정하지 마십시요.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겨 두겠습니까.
갖추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癸巳년(1653. 효종 4. 필자 47세. 司諫 시절로 추정) 2월 11일
계말(戒末) 휘 돈수
*주 : 김 신(金 紳) 1592(만력 임진. 선조 25년)--1665(현종 6년)
안동인. 자는 子肅. 1616년 생원. 壽 74세. 묘는 괴산 문광면 전법 後麓이다. 祖는 세칭 5甲의 셋째인 友甲(참봉공)이며, 父는 장자인 판관공 휘 시량(時亮)으로 公은 판관공의 제 5자이다.
6. 사휴제공의 작으로 추정되는 문인화 소개 (2003. 10. 17. 은회(익), 항용(제) 제공)
유형문화재 제33호. 관련 사이트 ://www.daegustory.com/dae-mun/mun-u/033.jpg
소재지:경북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51
용계(龍溪) 서변(1605∼1656) 선생이 49세 때에 어전 희우시회에 나가 1등상을 받았다는 기록과 그 광경을 그린 한 폭의 그림으로 가로 63cm,세로 57.4cm의 크기이다.
이 그림의 내용은 1653년(孝宗 4)에 가뭄이 오래 계속됨에 따라 효종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고, 이로 인하여 단비가 내려 13명의 홍문관 옥서신을 불러 희우시를 짓게 하여 하사품을 내리는 장면이다.
그 때 서변은 장원하여 말안장 1부, 호피 1령 , 호초 5근을 받았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사람은 당시 이름난 화공이 아니면 홍문관 관리들 중에서 문인 화가로 잘알려진 김휘가 아닌가 추측된다.
채색화로서 인물과 문방구 등을 섬세한 기교로 묘사하고 화풍은 격이 높아 조선 중기의 인물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사휴제공 휘 김휘 선조님에 관해서 1652년(효종 3) 3월 17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가뭄끝에 비가 왔다. 임금이 희우(喜雨)라는 제목으로 입직중인 관원에게 오언, 칠언 율시를 짓게 하였다. 운자는 '豊, 民'이었다. 김 휘는 수찬으로서 수석을 차지하여 표피(豹皮)와 호초(胡椒:후추)를 상으로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8)承旨公 諱 龜萬 神主(승지공 휘 구만 신주) -16世
先祖考 通政大夫 承政院 左丞旨 兼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府君神主 |
先祖女比 淑夫人 宜寧南氏 神主 |
*승지공. 휘 구만(龜萬) : 1632년(인조 10)--1699년(숙종 25).
자(字)는 元瑞(원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 출생.
1666(현종7년 35세)에 진사(進士) 급제, 1677년(숙종3, 46세)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숙종4, 47세) 문과 급제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1689년(숙종15, 58세)에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京畿右防御使 長湍府使), 1693년(숙종19, 62세)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694년(숙종20, 63세) 좌승지(左承旨)에 올랐고 1699년(숙종25) 68세로 몰(歿)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정(頂) 선영하(先塋下) 건좌(乾坐)이다.
유물 : 紅牌(문과 급제) 1매. 諭旨(장단부사) 1매.
<문과 급제 교지>
<장단부사 유서>
<묘소>
<친필 서찰>(<槿墨>. 성균관대학교. 1981. 636P. 2002. 7. 19. 항용 발견 제공)
<친필 서찰>(2002. 12. 23. 아트서울 경매 출품. 발용(군) 정보 제공. 2002. 12. 24. 항용 매입)
번 호 |
kkm-101 |
성 명 |
|
품 명 |
간찰(簡札) |
년 도 |
1673 (癸元→癸丑? ) |
크 기 |
36.5x32cm |
가 격 |
420,000원 |
察 謹謝賀狀 癸元禮上 龜萬 頓 新元祝賀 固當先奏於法奉之下 而聞遲里험兒之故 有意未果 此承先白至威且愧 生之今番所遭 非但其言相辱也 亦非焉 其人之可畏也 深報不足數之人 而問其職卽惡使也 所謂惡使者物言於隣邑門 吾不對面云 而畢竟迂路作行宿於絡原則其行果顧言矣 上官旣不欲對面則相下官何者敢我無所失而自安也 亦何敢謂無可畏而不動也 若使此身帶意職 而使彼兒輩千百作群而효효(시끄러울 효) 固不當動一毫矣 令則旣是外官且是下官 其之外更無他策 而聞金吾郞四散云此時守土之官不可容易離職 次是可復也 餘萬 00000 孫 晉士 下史
살펴주소서. 축하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계년(癸年) 새해 아침에 예를 올립니다. 구만(龜萬) 돈수
새해 초하루를 축하함은 예법으로 아래에서 받들어 먼저 아뢰어야 마땅했습니다만, 마을의 불량배 때문에 늦어졌고, 뜻은 있어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받고 보니 먼저 지극히 두렵고 또한 부끄러움을 아뢰나이다.
소생이 이번에 봉변을 당한 것은 다만 그 말에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잘못에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보복하려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직책을 물어보면 악사(惡使)들입니다. 소위 악사(惡使)라는 자들은 이웃 마을의 문간에서 물의를 일으켜 놓고도 내가 대면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굽은 길에서 하던 짓들은 원칙에 묶여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결국 언행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상관(上官)이 이미 대면하고 싶지 않다면, 서로 하관(下官)된 자가 어찌 감히 내가 잘못함이 없는 바에야 스스로 편안하겠으며, 또한 어찌 감히 두려워함이 없이 꿈적도 못하겠습니까. 만약 이 몸으로 하여금 관직에 뜻을 두게 하고, 저들 무리로 하여금 수백의 무리가 떼를 지어 시끄럽게 하더라도, 정말로 털끝만큼도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나중에 외관(外官)이라도 좋고 또는 하관(下官)이라도 좋은데, 밖에 이른다해도 다시 다른 대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금오랑(金吾郞. 주: 금부도사)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런 때에 국토를 지키는 관원이 쉽게 직책을 떠날 수는 없으니 차차 옳게 회복되겠지요. 나머지 모든...(이하 원문 파손 5자) 손(孫) 진사(晉士) 하사(下史)
*주--계원(癸元): '계(癸)'가 들어 가는 해의 정월을 의미함. 따라서 연대는 게축(1673. 진사급제 후. 42세), 1683(계해. 正言, 掌令시절. 52세), 1693(계유. 부호군 시절. 63세) 등으로 추정됨. 역자:益洙
(9)副護軍 諱 南挺 神主(부호군 휘 남정 신주)--17世
先祖考 嘉善大夫 折衝將軍 行龍槐衛副護軍 兼世子翊衛使 洗馬 府君 神主 |
先祖女比 貞夫人 廣州이氏 神主 |
*부호군. 휘 남정(南挺) : 1652년(효종3)--1731년(영조7).
자(字)는 백겸(伯兼).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荷島)에서 출생. 1691년(숙종17, 40세)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731년(영조7, 80세)에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을 수직(壽職)으로 받았다.
그 해 80세로 몰(歿)하였음. 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아래지경 건좌(乾坐)이다.
유물 : 白牌(진사급제) 1매
(10)通德郞公 諱 南採神主(통덕랑공 휘남채신주)-17世
先祖考 通德郞 府君神主 |
先祖女比 宜人 全州李氏神主 |
* 통덕랑공. 휘 남채(南採) : 1662년(현종3)-- ?
字는 중정(仲靖)이며 묘는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일명 西枾谷)이다.
(11)通德郞公 諱 必光神主(통덕랑공 휘필광신주)-18世
先祖考 通德郞公 府君神主 |
先祖女比 宜人 驪興李氏 神主 |
*통덕랑공. 휘 필광(必光) : 1674년(현종15)--1704년(숙종30)
字는 현경(顯卿).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향년 31세로 몰함. 묘는 사리면 새터
간좌(艮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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