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方慶 열전 03 (入仕와 항몽전쟁기① : 16-4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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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1-05 18:06 조회1,804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27일 모임을 대비해서 충렬공 휘방경 할아버지의 행적을 고려사열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는
1300년 이진 찬 [김방경 묘지명]
1350년 안진 발 [김방경 행장]
1392-1454년 김종서, 정인지 등 편수 [고려사 김방경열전]
안동김씨 대동보 (초보 : 1580 경진보)
김방경 연구 석사학위논문 3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기타 자료를 참고로 하고 있습니다.
金方慶 열전 03 (入仕와 항몽전쟁기 관직생활① : 16-48세)
1227 (고종14, 16세) 日兢의 음보로 양온사동정
1227∼1246 (고종14∼31, 16∼33세) 대정, 태자부견룡, 산원 겸 식목녹사, 서북면병마녹사, 별장, 낭장 감찰어사
1248(고종35, 35세) 서북면병마판관
1247∼1259 (고종34∼46, 36∼48세)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급사중 어사중승, 대장군, 지합문형부사, 금오위대장군
▣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찬)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근면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시며 신의있고 후덕하시며 과묵하고 엄숙하시며 비록 무관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재간이 능하시어 將軍으로서 給事中을 겸하시고 혹은 御史中丞을 겸하시고 혹은 金吾衛大將軍으로서 知閤門事와 또 知御史臺事를 지내시고 또 御史臺事를 지내시고 臺閣을 역임하면서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매사를 결단함에 있어 神明하고 늠름하고 엄숙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원에 따라 서북지방을 여러번 진압하시고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그 지방의 民謠는 지금까지도 공을 사모하고 있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을 지낸 선조 日兢의 蔭補로 양온사 同正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隊正이 된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 牽龍을 거쳐서
散員에 배명되고 식목綠事를 겸하게 되니 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郎將 監察御使로 전임하여 우창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도 듣지 않으니 어떤 대상이 권신에게 가서 참소하되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봉공하지 못한다" 고 하자, 이때 마침 공이 이르르니 권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고 하니,
공이 대답하여 가로되 " 전 어사와 같이 봉공할려고 하면 나도 또한 능히 할 수 있으나 다만 나의 중요한 근본요강은 국고를 채우는 데 있을 뿐이요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는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고 하니
그 참소하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권신도 또한 부끄러워 안색이 변하였다. 그때 공은 令旨대로 이를 다하고 돌아가니 국고가 만적하게 되었다.
정미년(1247)에 공은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승진되었다. 그 때에 몽고병이 침공해 들어오니 공은 여러 성주에게 명령하여 "위도(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하라" 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섬은 넓이가 10여리로서 조수가 자주 드나들어 농경을 할 수가 없어 공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게 하니 그 위는 수레가 능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안을 개간시켜 씨를 뿌려 농사를 짓게 하니 당시 백성들이 고생을 하다가 가을이 되니 만곡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한편 몽고병들이 계속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섬 사람들은 그 곡식으로 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또 한편 그 섬에는 우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육지까지 식수를 길러 갔다가 왕왕 몽고병들에게 포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공은 다시 뚝을 견고하게 쌓아서 조수가 드나드는 것을 막고 비가 올 때에 물을 가두어서 큰 저수지를 만드니 여름에는 그 물을 길러다 먹고 겨울에는 얼음을 뚫고 물을 쓸 수 있게 하니 이로부터 육지까지 물을 길러가는 노고와 몽고병들에게 붙들려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내 벼슬이 견룡행수를 대수하자 이때에 금위 관료들이 모두 권문세가에만 아부하고 내직은 게을리하니 공이 이르기를 "臣子의 의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고 하고 동료인 朴모와 더불어 相約하고 내직에서 근무하는데 비록 질환이 있어도 휴가를 얻지 아니하였다.
그때 직려가 비좁아서 禁中의 관료들이 모두 밖에서 자는데, 그 근방에 한 창녀가 있었으니 그 자색이 뛰어난지라 朴이 누차 끌어낼려고 하였으나 고이 거절하니 朴이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사과하였다.
이어서 禁中으로 천직되어 유섭將軍 겸 給事中 御使中丞으로 지명되어 臺閣에 출입하니 그 위풍과 곧은 절개가 조야에 용동하였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상 늠연(凜然)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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